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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씀을 전했다 - 베버 저「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통해 본 선교의 발자취] 3. 용산 신학교 방문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5-13 제 1154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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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피로 얼룩진 용산 일대를 순례
용산과 한강사이 강변은 한국교회 기반굳힌 처형의 장소
용산 신학교 베버 총원장 환영·휴강도
3월 7일 베버 총원장은 용산을 구경하기로 했다. 사실은 구경이아니라 순례였다. 왜냐하면 용산이 수도의 浦口란 주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한국민에게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천주교회의 역사에 중대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사상 중요한 사건들은 용산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무엇보다도 용산과 한강사이의 강변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그 기반을 굳히게 한 수많은 고문과 처형에 대한 산 증인이다. 한국교회의 기원은 실로 특이하다. 그러나 이교회는 하마터면 피로 질식될 뻔했다. 이러한 피의 역사에서 대원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는 실로 로마의 네로 황제에 버금가는 잔인한 인물이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 이어 한국에 처음으로 전교한 프랑스선교사 세분이 한강병원에서 처형됐다.

그들의 머리는 한강변 모래톱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교우들이 세목자의 시신을 거두어 한강 맞은쪽 산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외교인들은 이산을 세성인의 산(삼성산·三聖山)으로 부르게 됐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베버 총원장은 어느덧 용산 산마루에 다달았다. 바로 발밑에 용산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베버 총원장의 눈길은 새남터를 향해있었다. 멀리 평지에 작은집들 사이로 쓰러져가는 호올이 보인다. 여기가 사형을 행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너머 한강이 흐르고 또 그너머 비록 철뚝으로 좀 가려져있기는 하나 멀리 삼성산이 솟아있다. 산마루 바로 옆에 프랑스 선교사들의 묘지가 있다. 우거진 소나무숲의 적막함과 전원적인 평화스러움이 바로 그 밑의 일본 시가지로부터 들려오는 황금과 경박한 삶에 대한 요란스런 유혹의 외침에는 아랑곳 없다는 듯 다만 덧없는 인생의 종말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한국 베네딕또 수도회 최초의 희생자인 말띵 후버 수사도 거기에 묻혀있었다. 베버총원장은 골짝을 따라 신학교로 내려갔다. 신학교 소성당으로 부터 멀리 삼성산이 마주 보인다. 이 성당을 기증한 프랑스의 어느 부인이 그 뱡향으로 성당을 세워주도록 요청했다는 것이다.

성당 바닥 대리석판 밑에는 한국의 첫 신부 김 안드레아의 유해가 모셔져있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매일같이 성당을 찾는 신학생들에게 순교자들이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그의 희생적인 정신과 영웅적인 사랑을 배우도록 일깨우고 있을 것이다. 뭐뗄 주교가 바로 이 장소를 신학교 자리로 골라잡은 사실에 도무지 놀랄 것이 없다.

처음 한옥에서 시작된 용산 신학교는 이제 한국 사정에 비추어 놀랄만한 건물로 발전하였음에도 아직·도처에서 한국교회가 계속 싸워 이겨야할 궁핍을 느끼게 한다. 용산신학교는 그를 환영하는 뜻에서 오후강의를 쉬었다.

용산신학교는 신입생을 3년마다 한 번씩 받는다고 한다. 해마다 신입생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한국교회는 그만큼 빨리 발전할 것이다. 성소가 부족하거나 희생정신이 없어서 그런건 아니다. 부족한 것은 재력과 선생 신부 뿐이다. 장차 부득이 신학교가 폐쇄되는 운명의 날이 올 수 있을지는 모르나 성소가 소멸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悲運이 순교자의 피로 축성된 이 땅에 근접하지는 못할 것이다.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