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이렇게 말씀을 전했다 - 베버 저「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통해 본 선교의 발자취] 2. 베버 총원장의 입국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5-06 제 1153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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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2월 부산 입항 · 열차로 서울 착
상업 영향권 벗어난 백동 수도원 - 미래집합지로 예견
일입 상업 독점으로 한국인 밀려나
1911년 2월 21일 새벽 부산항에 내린 베버총원장은 서울행 열차를 탔다. 서울까지는 열시간반이 걸린다. 강가에 어부가 앉아 장죽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철로를 등 뒤로 한 채 기차가 지나도 돌아보지 않고 흘러가는 푸른 강물 줄기만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개의 탑이 있는 성당이 보인다. 대구이다. 대구는 인구가 2만, 천주교 신자가 1천5백명이란다. 그날 저녁으로 서울에 도착하기위해 쉬지 않고 여행을 계속했다.

이날 밤 8시경 베버 총원장은 서울 남대문 역에 도착했다. 인력거의 행렬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인력거로 창경원까지 40분이 걸린다. 낮이면 창경원에서 베네딕또 수도원이 보인다고 한다.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수도원 창문에는 불빛하나 비치지 않았다.

백동언덕 밑에 이르러 베버총원장는 인력거에서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빨간 촛불을 켜들고 그를 환영했다. 이제까지 본적이 없는 놀라운 촛불과 십자가의 행렬이 수도원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암흑세계에서 헤매는 이교도들을 십자가의 광명으로 비추라는 뜻 깊은 표지인가. 원장신부로부터 받은 부서진 십자고상 일찌기 한국의 어느 순교자에게 죽음의 길에서 신앙의 용기와 헌신의 사랑을 불러 일으켰다는 이 고상 또한 의미심장한 표지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순교자의 땅에서 받은 첫 번 인상은 그의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베버 총원장는 첫날밤을 수도원에서 잤다. 이튿날 아침 그는 먼저 수도원을 둘러보았다. 수도원은 참으로 위치도 좋고 전망도 좋았다. 언덕아래 서남쪽에 수도원이 경영하는 사법학교와 직업학교가 있었다. 전체면적이 14㎞. 이것으로 수도원의 식구뿐만 아니라 사법학교와 직업학교생들을 부양해야했다.

백동언덕 위에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여기에 20만명의 한국인 4만명의 일본인 2천명의 중국인 1백여명의 서양인이 함께 살고 있다. 멀리 시내 끝에 가톨릭대성당이 보인다. 마치 낮은곳에 사는 외교인들에게 광명과 사랑을 주기 위한 듯 장안에 높이 솟아있다.

이날 오전 베버 총원장는 독일영사관과 민(뮈떨) 주교를 방문하기위해 인력거를 타고 종현을 향해 떠났다. 걸어가면 40분이 걸린다. 서울거리에는 구경거리가 여기저기 산지해 있었다.

대성당이 가까와지면서 서울의 모습은 크게 변한다. 한옥은 점점 사라져가고 성냥갑 같은 일본식 목조건물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언뜻 일본식 건물은 한옥보다 세련되어 보인다. 그러나 한번 화재가나면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 것이니 큰 흠이 아닐 수 없다.

여기저기 상점들이 즐비하다. 일인들은 한국을 침략하면서 상업도 독점하였다. 한국인들에게는 기업심이 없다. 한국인들은 점점 이 지역에서 밀려나고 있다. 그들은 일본사람에게 집과 땅을 일본사람에게 집과 땅을 헐값으로 팔아넘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러니 몇 년 안가서 대성당주변 일대는 완전히 일인거리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변두리 변두리 우리 백동은 복잡한 교통과 상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있다. 뿐더러 성곽 안에는 아직 공지가 많다.

아마 백동의 우리 수도원은 한국인들이 그들의 수도에서 완전히 쫓겨나지 않기 위해 장차 集合地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