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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쇄신 - 무엇이 문제인가?] 6. 흠숭행위와 성령쇄신운동 3. 성령쇄신적 흠숭행위의 영향 - 상

스타인들 라스트 수녀ㆍ베네딕또회
입력일 2011-04-14 수정일 2011-04-14 발행일 1978-11-19 제 1130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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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숭행위는 자발적 이어야
의무적이고 고정적인 기도개념을 배제
규율이나 통제아닌 사랑의 충고 요구돼
참된 기도방식 제시、교회흠숭행위에 활력소돼야
성령기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도의 자치적인 자발성이다. 이성력 기도는 성사적인 전례나 예절 등에서 의무적이고、고정된 기도문에 많은 량의 기도가 혼합돼있는 공식적인 기도의 개념과는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비록 지금 이 공식적인 기도를 잊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수년전까지만 해도 이공식기도가 교회활동을 지배해온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기도의 그릇된 개념을 받아들이려는 위험은 항상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성실한 사람들 가운데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그들의 덕행 자체가 자신들을 어둡게 덮어버리는 것이다. 이 어두운 그림자는 공적인 기도에서 개인적인기도방식이 빈축을 사게될 때 아주 잘 확대돼 나타난다.

이런류의 기도는 스위스철도청의 한 예를 생각케한다. 즉 기차들은 단한사람의 승객이 올라탔든 안탔든 상관없이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면서 오고간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기차는 서로 다른 종류의 운반기관이다. 마르꼬복음 2장27절에『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고 기록돼있다. 따라서 복음은 일반대중의운반기관이며 나는 심사숙고한 뒤에 자치적인 자발성에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혼자서 노래하는 것과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이둘 두 경우에 있어 노래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동일하다. 곧 꼭바로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표현 그것이 자발적이 되게하는 것이다.

자치적인 자발성을 이루기란 여간 어려운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일치에 많은 행동을 요구한다. 즉 그들은 모두 한마음이 돼야 하며 그리고 그들의 흠숭행위는 바로 이한마음에서 나와야한다.

이것은 또 규율과 통제와는 아주 다른 사랑의 충고를 요구한다. 차지적인 자발성은 노든 형태의 통제를 배격한다. 또 이것은 사회적인압력에 의해서 한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방언이나 행동양식 등을 따르도록 하는 교묘한 형태의 통제 속에서도 진실된 것을 파악한다.

하나이신 성령이 사용하는 방법에는 어떠한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어떤 하나의 형태 속에 성령을 제한시킬 수 없다.

또 아무도 성령쇄신과일체가 된데서 부터 들러날 수 없다. 그 이유는 자기에게 주어진 그 형태가 자기 자신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새롭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성령에게 생기있는 기도를 바치는 하나의 도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함께 모여 흠숭행위를 바치는 것이 활기가 있고 또 참석자들의 마음에서 부터 진심으로 우러나는 것이라면 그 방식은 상관이 없다. 따라서 자치적인 자발성의 정도는 그 공동체의 흠숭행위가 참으로 활발한가를 나타내는 표준이 된다.

여기서 3가지의 중요한 관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자발성은 조직과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지로 자발성은 조직을 전제로 하고 있다. 둘째로는 자발성가운데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중에서 성령기도회의 자발성은 다른 흠숭행위를 바치는 공동체들이 모방해야할 표준적인 모델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셋째로 성령쇄신은 다른 공동체들이 모방하도록 어떤 형태를 제공함으로써가 아니라 어떤 방식의 기도가 참으로 바람직하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교회의 흠숭행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된다는 것이다.

자발적이 되는 어떤 특별한 방법에 관해선 거론하고 싶지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흠숭행위에는 요컨대 자발성의 여지가 있어야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전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기도는 자발성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형태의 모든 가능성을 촉진시키고 있는가、아니면 전례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거나 혹은 자발적인 의향을 봉쇄시키고 틀에 박힌 양식이나 인쇄를 혹은 미리 나눠준 기도문을 외우는 것으로 끝내버리는가? 그리고 만일 자발적인 기도를 할 때 그 자발적인 기도는 무엇을 청(請)하는데에만 극한 되는가?

자발적인 탄원은 성령기도회에서 흔히 나타난다. 성령기도회 참석자들은 간청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고 지은 죄를 뉘우치며 감사하고 아울러 타인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이 같은 기도의 확대는 성령기도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으로 그 방식이나 내용이 별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기도할 때 우리가 간청하는 기도의 성질을 고려하는 일도 중요한 특징이다.

자발성을 발휘하는데는 넉넉한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한다. 이것 역시 우리가 성령기도의 방식이나 내용을 고려하기 이전에 본받을 가치가 있는 성령기도의 한 특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의무감 없이 자유스럽게 그것도 몇십분이나 혹은 몇시간이 걸리는 상관없이 기도를 하기위해 모인다면이것은 쉴 새 없이 바쁜 본당의 일요일아침 스케줄에 크나큰 차질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령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이 이런 도전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같은 도전은 흠숭행위가 하느님께 참미만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그 흠숭행위가 진행되는 만큼의 시간도 바쳐야한다는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성 다음으로 공동기도의 체험은 성령쇄신이 전례적인 흠숭행위에서 기대하는 수준을 향상시킨 또 다른 한 영역이다. 공동기도는 어떤 면에서 성령기도 그룹들 중 가장 대표적으로 결합돼있는 자치적인 기도형태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공동기도는 함께 기도하는 수많은 형태들 중의 단지 한 형태에 불과하다.

이와 반대로 어떤 그룹도 함께 무엇을 나누지 않은 한 참으로 함께 모여 기도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없이는 기껏 형식적으로 모여 기도하는 것 외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곧 후자는 이런 차이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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