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분발하소서, 교황님! - 비이태리인 교황선출의 역사적 배경

백민관 신부ㆍ가톨릭신학대학 교수
입력일 2011-04-14 수정일 2011-04-14 발행일 1978-10-29 제 1127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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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국 추기경선출 우연 아닌 주님 뜻
교회의 대공산권관계 새정책 기대돼
교회=로마, 교황=이태리인의 도식 그리스도 뜻과 무관
놀라운 일이다. 교황은 이탈리아인이라는 오랜 전통을 깨고 이탈리아인이 아닌 이방인이 교황에 선출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것도 미국인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닌 공산국의 추기경이 교황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이번 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등극은 한마디로「놀랐다」다.

비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선출하고나오는 추기경들 자신도 놀랐을 것이다.

온 세계도 놀랐다. 그래서 아직도 새 교황 선출과 앞으로의 교회에 대한 논평을 하지 못 할 만큼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처럼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교황ㆍ이탈리아인의 전통적인 도식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이제 가톨릭교회와 로마교황과 이탈리아인의 상관관계를 역사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다.

그 행정조직의 대헌장은 간단히 열두제자와 그 수반인 베드로다.

열두 제자단을 계승하는 주교단과 그 수반인 베드로의 계승자인 교황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교회조직의 중추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교회와 로마、교황과 이탈리아인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는 아무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관계가 가톨릭교회의 특징처럼 여겨져 온 것은 단순이 그 역사성 때문이다. 이 두 관련선중 교회와 로마와의 관계는 교회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한 민족과 자기 땅과의 관계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고 교황과 이탈리아인과의 관계는 첫째관계에서 나오는 부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총 본산인 교황청과 로마와의 관계는 거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로마를 가리켜 영원한 성도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보건대、로마가 교회의 총 본산이 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임명을 받은 베드로가 로마에다 교회의 터전을 잡은데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이교도들의 사도라고 불리는 바오로도 로마에 같이 있으면서 만백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때부터 로마는「베로드의 성좌」「로마 가톨릭교회」「사도좌」등의 고정적 명칭이 붙게 되었다.

과거에 이교도들의 영화의 중심지였을 때에「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던 격언이 이때부터는「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성 암브로시오는 로마 주교로서의 베드로의 수위권을 강조하면서『베드로가 있는 곳이 곧 교회이다』라고 부르짖은 일이 있다.

로마는 베드로ㆍ바오로 두 대사도의 순교로써 그 기반이 든든해졌다.

그 후 삼백년 동안의 박해에서 흘린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는 로마와 교회를 불가분의 관계로 맺는 혈서와도 같이 되었다. 로마주교의 수위권문제는 교회가 커짐에 따라 말썽이 없지는 않았지만 무력도 아니고 제3자의 재판도 아닌 자연적인 추세로 모두가 인정하게끔 되었고 교회사적으로 볼때에도 교회에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로마의 주교가 수위권을 행사하여 모든 지방교회에 대한 책임을 졌다.

베드로가 로마에 온 해는 확실치 않지만 전설에 따르면 42년이라고 한다. 그 10년 후에 바오로가 들어왔다고 한다. 이 두 분의 순교일도 확실치는 않지만 대체로 67년이라고 전한다.

초대교황인 베드로가 순교한 후부터 교황-이탈리아인의 관계가 부수적으로 따라온 것이다.

베드로와 교회와 로마가 불가분의 관계는 가졌지만 베드로의 후계자는 반드시 로마인이라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선 베드로 자신이 로마인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산이 로마가 된 이상 실제로 로마의 주교는 로마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교통이 문화의 교류가 어려웠던 초대에는 더욱 그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인이 곧 이탈리아인은 아니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가 된 것은 1870년 일뿐이다.

그러나 그 피가 그 피이니 역대교황은 이탈리아인이라는 무시 할 수 없는 전통이 생긴 것이다.

베드로를 직접 계승한 제 2대교황은 성리노 로마 주교이다.

선거로 된 것도 아니고 누구의 추천으로 된 것도 아니다. 더 더구나 세력을 가지고 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저 묵시적인 인정으로 된 것이다. 그 후부터 로마의 주교이며 교황이 된 사람은 교회사상 몇 명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탈리아인이었다.

이렇게 교회사를 훑어볼 때 이번에 폴란드인교황을 뫼시게 된 우리는 역사적으로 희귀한 때를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역사는 하느님의 구세사업의 역사라고 한다. 폴란드인을 교황으로 뫼시게 된 것을、한나라에서 생각지도 않던 사람이 대통령으로 뽑힌 정도로 우연이 있을 수 있는 사건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지내봐야 알일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살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비 이탈리아인 교황이 탄생한 것이 455년이래 처음이라 한다. 그러니 현 요한 바오로 2세 이전의 비이탈리아인 교황은 하드리아노 6세이다.

그 분은 네델란드 인이었다. 1522년에 등극하여 그 이듬해 1523년에 돌아가신 단명의 교황이었다. 그분의 교황선출과 이번 새 교황의 선출을 비교해보면 그 시대 배경이 비 이탈리아인을 선출한 심정을 설명해줄 수 있다.

우선 하드리아노 6세 이전의 세계정세는 교회가 교회사상 가장 어려운 내정(內情)사항을 안고 있었다. 그저 임자였던 레오10세는 교회의 외적인 전시로 말미암아 재정을 무일전의 상태에 빠뜨렸고 세계사에서 유명한 마르틴 루터의 종교혁명을 유발케했다. 이 종교혁명은 요원의 불길처럼 온 구라파를 휩쓸어 교회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깜박거리던 때 였다. 그 당시 네덜란드 종교혁명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교황선거가 원체 비밀로 영원히 묻히기 때문에 그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당시 새 교황을 로마인이 아닌 프로테스탄트국인을 선출한 추기경들의 의도는 알만하다. 과연 새로 된 하드리아노 6세는 교회 밖으로는 혁명가들을 다루는 일이 있었고 안으로 교회생활의 쇄신이라는 큰 짐을 지고 종교혁명가들과 대화를 모색했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당치도 않은 일로 교황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위 야만인 교황이란 별명을 붙였다. 교황은 일의 중압에 눌려서 그 이듬해 65세로 서거하셨다.

인류가 살아온 역사상 가장 흉악한 흉물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늘의 세대에 나타난 대레비아땅 공산주의가 아닐까. 공산주의는 생겨난 지가 4、50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세계의 과반수의 땅을 이미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적제1호는 물론 종교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무시한다. 그들은 인간자체도 물질로 본다. 그들의 하는 일은 오로지 전쟁 뿐이다.

전쟁은 그들의 유일한 윤리다. 이 모든 일보다 더 흉악한 것은 그들은 언제나 진실 되지 않다는 사실이다.

다위성 왕이 읊은 성시를 공산주의자들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다위성 왕을 못 살게 군 잡군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다. 교회가 무슨 일을 당하고서 반응을 보이는 시간은 전통적으로 상당히 느리다 공산주의 4、50년 이래 무엇인가 반응을 보일 때가 오지 않았는가.

한편 교회 내에 지니고 있는 오늘의 문제는 다른 모든 문제보다도 질서의 확립이다.

자유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경제주의 등등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지상에서 천국으로가 아니고 천국에서 지상으로 제각기 제멋대로 내닫고 있다.

이 영향은 교회 내에서도 흘러들어 매년 해를 거듭할수록 다른 소리를 듣는다.

믿어도 천당 가고 믿지 않아도 천당 간다고도 한다. 이제 교회의 자세확립이 시급해지지 않았는가. 아마 교황선출에 임하는 추기경들이 이런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새 교황을 뽑지 않았을까. 하여튼 새 교황은 어려운 짐을 지게 되셨다. 다위성 왕이 읊었듯이

『분발하소서 하느님、어찌하여 주무시고 계시나이까!』

백민관 신부ㆍ가톨릭신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