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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쇄신 - 무엇이 문제인가?] 4. 흠숭행위와 성령쇄신운동 1

스타인들 라스트 수사ㆍ베네딕또회
입력일 2011-04-14 수정일 2011-04-14 발행일 1978-09-24 제 1122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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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쇄신은 흠숭행위의 쇄신 의미
쇄신돼야할 것은 외적형태 아닌 내적정신
자신을 버림으로써 영광얻는 지혜 배워
이글은 뉴욕「앨미라」에 위치해있는 구세주산(山)의 베네딕또수도회 스타인들 라스트 수사가 쓴 것으로 그는 코네티컷州「트룸불」의 성령 연구 센타 공동설립자의 한사람이며 의장이기도하다. <편집자註>

■새로운 흠숭행위의 발단

가톨릭교회 내에서의 성령쇄신은 그 발전 면에서 새롭고 결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 성령쇄신이 가톨릭성령강림운동으로 불려 지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운동은 자체의 내적인 힘과 기도형태 및 다소의 한정된 회원 수를 갖는 단순한 하나의 운동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상과는 상당히 다른 무엇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이 운동의 주요한 흐름에 단지 두세번 접촉한 사람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신기한 추진력의 전파였다. 이것은 곧 중대한 사건의 고무적인 변화로 아직까지는 납득이 갈만큼 알려져있지는 않다.

오늘날 미국에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려는 크리스찬들과 종교단체 및 전체본당들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1967년「듀켄」에서 일어났던 활발한 움직임에 자주 영향을 받고 있으나 그러나 그 당시의 일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상태이다.

곧 이 모임 출발당시의 열광이 여과돼서 교회에 전해진 것은 눈에 띄는 성령께 대한 신앙심을 보다 명백히 하는 것 보다 더욱 큰 중요성을 갖는 사건이라 하겠다.

실지로 이 과정에서 여과된 것은 주로 방법론적인 것으로 모임의 생명력과 매시지는 오히려 여과됨으로써 정화되고 또 더욱 강화됐다.

즉 성령강림운동의 방법을 덜 강조할수록 그 효과는 더욱 커 이 운동이 쇄신의 추진력이 되게 했다. 따라서 누가 이운동의 회원이며 회원이 아닌가를 말하기 어려워지고 또 이 운동만의 독특한방법과 방언 등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되면서 이 운동은 최대의 힘을 발휘 하게됐다. 즉 이 운동은 가톨릭교회내의 특별한 하나의 쇄신운동의 범주를 넘어 교회자체의 쇄신과 불가분의관계에 놓이게 됐다.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이우리의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성령쇄신은 결국 흠숭행위의 쇄신이다. 따라서 성령쇄신은 우리의 매일의 신앙생활에서 나타나는 흠숭행위의 형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또 다른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를 대신하는 그런 식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흠숭행위에서 쇄신돼야할 것은 외적인 형태가 아니라 그것은 바로 흠숭의 내적인 정신이다. 새로운 정신은 곧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여는 대상이 성령이라면 외적인 형태의 지속성은 자연히 따라 올 것이며 그 안에서 쇄신된 형태의 흠숭행위가 다른 어떤 것보다 더욱 성실한 전통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이것 역시 우리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난국(難局)에 처했을 때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쇄신은 항상 도전이며 비판을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 도전은 새로운 창조를 불러일으키고, 비판은 불변의 것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우리의 순수한 노력까지도 부셔놓고 만다. 그래서 도전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비판도 격해진다.

성령쇄신은 교회의 흠숭행위에 3가지 모양으로 도전을 가한다. 그 첫째는 크리스찬 각자에 대한 개인적인 도전이며 둘째는 흠숭행위를 위해 모인 공동체에 대한 도전이며 마지막 세번째로는 교회의 흠숭행위 전반에 관해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는 지도자들인 주교와 신부들대한 도전이다.

위에서 언급한바있는 난국에 처했을 때 대처한다는 의미는 이들 3개 그룹에 각각 다르게 이해돼야한다.

먼저 개인적인 흠숭행위자에게 있어 결정적인 의문은「나는 근본적으로 흠숭행위를 바침으로써 얻은 은총으로 충만해있는가, 그 은총들은 영적(靈的)이며 사회적인가, 그리고 나 자신은 기꺼이 하느님의 현존 속에 나 자신을 내맡기는가?」등이다.

다음으로 흠숭행위를 발하는 공동체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봐야 한다. 즉「우리는 우리의 모임이 거짓된 것이 아닌 정당한 모임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며 또 모임의 형태는 새로운 것인가, 아니면 오래된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오래된 형태가 유력한 곳에서는 그것을 육성하고 지속시키는 동시 단순히 일수적인 유행에 맞서 그것을 장려할 용기를 갖고 있는가?

또 우리는 새로운 형태가 바람직하고 오래된 형태를 방치해둠으로 인해 못쓰게 된 것을 활기 있게 부흥시키기 위해 새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제기되는 질문은 가장 예리한 것으로 간단하면서도 중대하다. 즉「우리는 흠숭행위의 지도자들인가, 혹은 흠숭예절의 안내자들인가?」

한마디로 성령쇄신의 도전을 심하게 받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와 같은 의문을 피할 수 없으며 그의 문은 단순히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부딪히게 된다.

■흠숭행위자 개인에 대한 개별적 도전

마태오 6장5절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기도할 때에 여러분은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시오.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에서나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받은 상을 벌써 다 받았습니다』

남에게 보이려하는 것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은 것이다. 그들은 흠숭행위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를 향상시키려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 중에는 이와 같은 유혹에 조금도 말려들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그 유혹은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예의바름이나 기행(奇行)등을 과시하는 것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참된 흠숭행위는 우리가 우리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데서 출발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최근의 가톨릭교회전통은 특별하고 위엄있게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서는 뚜렷한 자의식(自意識)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결국 반대방향에서의 조그마한 충격은 흠숭행위에 있어 무의식과 자의식간의 균형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윗성왕이『제단 앞에 악사들을 세워 그들의 노래로 가락을 더 아름답게 했으며 축제를 성대하게 벌이고 장엄하게 예식을 치르게 하였다』(집회서47장9∼10절)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은 바로 다윗왕이 전례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흠숭을 명백히 했음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또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흠숭행위의 개념과도 부합된다.

그리고 우리는 다윗왕이 하느님의 궤를 오베데듬의 집에서「예루살렘」으로 옮겨온 다음「모시 에붓을 입고 야훼 앞에서 덩실거리며 춤을 춘」(제2사무엘서 6장14절)사실도 알고 있다. 이 장면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 광경은 다윗왕의 부인들 가운데 유일한 왕녀이며 사울의 딸인 미갈에게도 같이 나타났다.

『야훼의 궤가 다윗의 도성에 들어올 때 다윗왕이 야훼 앞에서 덩실덩실 춤추는 것을 사울의 딸 미같이 창으로 내려다보고는 속으로 비웃었다』

(제2사무엘기 6장16절)

나중에 다윗왕과 그를 비웃던 미갈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미갈이『오늘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체통이 참 볼만하더군요. 건달처럼 신하들의 여편네들이 보는 앞에서 몸을 온통 드러내시다니』하자 다윗왕은 미갈에게『야훼께서는 그대 아버지와 그대 집안을 다 제쳐 놓으시고 나를 택하여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주셨소. 나는 그 야훼 앞에서 춤을 추었소. 나는 앞으로도 야훼 앞에서 춤 출 것이며 이번 보다도 더 경망히 굴 것이오.

그대는 나를 천하게 보겠지만 지금 말한 그 여편네들은 나를 더욱 우러를 것이오』(제2사무엘서 6장20∼23절)라고 대답했다.

여기서『나는 천하다』는 표현이 바로 다윗왕의 흠숭행위를 이해하는 열쇠다. 나는 참으로 보잘 것이 없는 사람이니 만치 나는 나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윗왕은 앞으로도『나는 야훼 앞에서 춤을 추겠다』고 말했다.

왕녀 미갈은 결코 자신을 보잘것 없는 사람으로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현명한 사람으로 만드는 지혜를 배두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끝내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그 뒤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제2사무엘서 6장23절)

여기서 우리는 양자택일해야한다. 즉 우리는 죽을 때까지 아기를 갖지 못한 왕녀 미갈처럼 거만한 태도로 흠숭행위를 바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 여자들과 함께 특히「마니피깟」을 노래한 성모마리아처럼 자신을 버림으로써 영광을 차지할 것이가? 이것이 바로 성령이 기도회에 처음 참가하는 신자 개개인이 흔히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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