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말씀을 심는다 - 일선 전교사의 체험기] 75. 상처투성이 동심/김 이사벨라 수녀 12

김 이사벨라 수녀ㆍ마리아회
입력일 2011-04-14 수정일 2011-04-14 발행일 1978-09-17 제 1121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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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체험에 멍든 애처로운 작은가슴
가끔 옛얘기도 들려주며 정서순화시켜
교회의 사랑과 사회의 따뜻한 관심이 함께해
오늘도 대기소엔 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단속되어왔다. 떨어진 가마니를 덮어쓴 아이, 푸대 조각을 걸친 아이… 그들의 몸은 왼통 먼지와 상처투성이 었고 설상가상으로 음까지 번져있었다. 대기소엔 매일 매일의 정해진 숫자가 없다. 거리를 방황하다가, 패 싸움질을 하다가, 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실러오거나 맹아나 불구자가 된 채 길거리에 버려져 있다가 단속되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 중 가정이 있는 아이는 연락을 해서 아이를 데러가게 하고 연고자가 없거나, 있어도 데려갈 수 없는 처지의 아이들은 우리어린이마을에서 보호를 한다.

그 애들의 출생이나 주위의 환경을 조사해보면 정말 아연해질 때가 많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자신에게서 조차 버림받았다는 헤어날 수 없는 절망감… 그 절망감이 그들을 무절제하게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자포자기 하게한다.

그들에게는 교회의 사랑뿐 아니라 사회의 따뜻한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들이 일생 우리 집에서 함께 산다는 것도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곧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데 커다란 문제가 있다. 사회가 우리 집엔 과거의 극심한 충격으로 뵈여 장애를 일으키는 애들을 자주 대할 수 있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날은 별문제성이 없어 보이는 TV의 일요사극을 어린이들이 시청하도록 했다.

우리 집에서는 어떤 프로그램이라도 아이들에게 자극을 줄수있는 것은 제한하고 있지만 그날의 사극은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가『아악!』하는 외마디소리와 함께 후닥닥 뛰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수였다.

어둠속을 그냥 달리는 정수를 붙잡아 옆방으로 데려갔다. 정수는 여전히 부들부들 떨면서 무섭다며 소리치고 있었다.

『눈에서 피가 흘러요. 무서워요.』

『그건 연극이야 정수야!』

『피가 흘러요. 무서워…』

『정수야…』

한참 후 다소안정을 되찾은 정수가 입을 열었다.

어느 날 저녁 술에 잔뜩 취한 정수의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싸움 끝에 꼬챙이로 어머니의 눈을 찔렀고.

어머니는 흰 차에 실려 간 채 소식이 없고 겁에 질린 정수는 가출, 거리를 방황하다 우리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그날 밤 정수는 40도를 오르내리는 열을 내며 무섭게 앓았다. 난 찬수 건으로 정수의 머리를 식히며 처참하게 짓밟힌 동심에 대한 분노로 몸이 떨렸다.

정수가 눈을 떴다.

『엄마…』(그들은 우릴 엄마라고 부른다)

『지금 생각이 나요. 그때 우리 꽃밭에 있는 땅콩을 내가 뽑았더니 엄마는 깜짝 놀라시면서 슬퍼하셨어요. 땅콩이 그렇게 좋으시면 이담에 돈 많이 벌어서 사드리겠다니깐 엄마는 돈을 주고 사는건 소용이 없단다. 이 땅콩은 내 마음의 선물 걸… 하셨어요. 내 마음의 선물이 뭐죠? 얘기해줘요 엄마』

느닷없는 정수의 말에 웃음이 날려고 했지만 그 얼굴이 너무도 진지해보여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내 어릴 적 얘기를…

『그러니깐 내가 너만 할 때였단다. 내겐 향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린 얼마나 친했던지 향이가 우리 집에서 자기도 했고 나도 향이 네서 자기도 했단다. 향이가 사는 곳은 땅이라곤 온통 모래만 가득한 작은 섬마을이었어.

그날 저녁은 둥근달이 마을이랑 모래랑 물결이랑 우리들을 비추고 있었단다. 한번 상상해 보렴. 꿈결 같은 달빛 속에서 그 고운 모래 위를 뛰어 다니는 모습을. 달빛에 반짝이는 물결에 하하하 웃음을 튕기고 모래에 뒹굴며 시간가는 줄도 몰랐단다.

갑자기 향이가 땅콩이삭을 주워야 한다면서 나도 따라오라는 거야. 그 백사장엔 곡식이 자랄 수 없었지만 땅콩만은 잘 자란다고 그랬어. 난 향이랑 발로 손으로 모래를 파헤치고 더듬거리며 거의 반자루나 되는 땅콩이삭을 주웠단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 모래 속에서 땅콩이나 오다니-. 그런데 며칠 후 향이가 작은 보따리를 내게 주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막 뛰어가 버리잖아. 집에 와서 끌러보니 무엇이겠니. 그래. 바로 땅콩이었단다. 그리곤 편지도 함께 있었는데-숙아, 마지막으로 네게 오래오래 남을 선물을 주고 팠는데 아무것도 없구나.

부디 이걸 마음의 선물이라 생각하고 땅콩을 까먹으면서 한번이라도 향이를 기억해주면 고맙겠어.

그 후 향이는 멀리 이사를 갔고 여태까지 한 번도 만나질 못했단다. 그렇지만 난 해마다 우리 집 앞에다 그 콩을 심고 향이 생각을 했고 수녀원에 온 후에도 우리엄마께선 그 씨앗을 없애시지 않으셨단다. 그리고 작년에는 이곳으로 그 씨앗을 보내 주셨어』

내 얘기를 듣던 정수의 얼굴이 평온해지더니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열은 정상으로 내려 있었고 정수는 내일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김 이사벨라 수녀ㆍ마리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