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안영의 초록빛 축복] 시간표까지 짜 주시는 하느님

입력일 2011-03-30 수정일 2011-03-30 발행일 2011-04-03 제 2740호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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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느끼고 계십니까?”
저는 오래 전부터 신년 달력을 받으면 맨 먼저 해온 일이 있습니다. 색연필을 들고 조상들의 기일, 가족들의 생일, 그리고 영명 축일 등을 커다랗게 표시하는 일입니다. 그러고는 매월 초가 되면 그날을 위해 미리 미사를 맞추고 어떤 일이 있어도 참례하는 것입니다.

칠순을 넘기면서부터는 새롭게 자신과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대림시기와 사순시기 만이라도 매일 새벽미사를 드리자는 것이었지요. 작년 사순시기에는 그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혹여 빠질세라 먼 길 나들이도 삼가고, 새벽에 못 깰까봐 서둘러 자리에 들고, 감기라도 걸릴까봐 각별히 건강에 신경 쓰면서 사십일 동안 개근하고, 마지막 성삼일도 완벽하게 지켰습니다. 덕분에 최고로 기쁜 부활을 맞이했지요. 성야 미사도 좋았지만 주일 교중 미사는 그야말로 ‘따따봉’이었습니다. 성가대의 거룩한 글로리아 찬미를 들으면서, 미사 후 청소년 풍물패의 신나는 사물놀이 연주를 들으면서, 마치 천상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듯 온몸이 두둥실 떠올랐답니다. 그 충만한 기쁨을 자랑하고 싶은데, 마땅한 데가 없어 집으로 돌아와 남편 스테파노의 영정 앞에서 환히 웃으며 애교를 부리기도 했지요.

새벽미사에 나가 보면 대개 오는 분들이 정해져 있습니다. 젊은 사람도 많지만 어르신이 더 많습니다. 껌껌한 새벽에 마을버스를 타고 오시기도 하고, 가까운 데서는 걸어서 오시기도 합니다. 중노의 자매들 대여섯 명은 약속을 해서 나오는지, 미사가 끝나면 성모님 상 앞에서 함께 만나 아침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하루 일과를 ‘생명의 물’부터 마시고 시작하는 그분들을 보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지요. 특히 허리 굽고 등 굽은 할머니들이 일찍부터 나와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뵈면 저분들이 우리 교회를 떠받치는 버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즈음 저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생각보다는 어렵습니다. 글을 쓰기 좋은 시간은 새벽이므로 5시 전후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보면 깜빡 시간을 놓치게 되지요. 그래서 또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평화방송 티브이를 켜고 6시 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그날의 말씀도 듣고, 성찬 전례도 함께하고 성가도 부를 수 있어 미사 드리는 기분이 됩니다. 단 하나 성체를 모실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지난 사순 제 2주일의 일입니다. 매주 목요일은 본당 어르신대학에서 말씀 봉사를 하는데, 그날의 주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 저는 다음날인 3월 25일이 바로 ‘예수탄생예고축일’이라고 알려 드렸지요. 그런데 하필 그날 새벽미사를 놓쳤습니다. 특별한 축일에 자신과의 약속을 어겨 찜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10시 미사도 있음을 생각해냈지요. 천만다행으로 외출 약속이 없어, 시간에 맞추어 나갔습니다.

축일에 맞추어 신부님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대한 강론을 하십니다. 그 전 날, 제가 어르신들에게 들려드린 이야기라 귀에 잘 들어옵니다. 어린 소녀 마리아도, 약혼자 요셉도, 가브리엘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여 구원사업에 협력했음이 그저 황감하지요.

그런데 미사가 끝난 뒤였습니다.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참석자들이 조용합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임신부님께서 큰 십자가를 들고 보좌신부님들과 함께 나오십니다. 금요일 10시 미사 후엔 ‘십자가의 길’ 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 바로 이 기도를 바치려고 새벽미사를 놓친 것이로구나. 저는 뜻밖에 횡재를 만난 듯 기뻤습니다. 사순시기 동안은 십자가의 길 기도가 있다는 것도 들었건만 나가지 않고 게으름을 부리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오묘한 방법으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항상 시간표까지 짜 주시는 나의 하느님,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