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올레길 신앙길 (10) 옛 철길 따라 걷는 의정부교구 마재성지

임양미 기자
입력일 2011-03-23 수정일 2011-03-23 발행일 2011-03-27 제 2739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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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순교정신 깃든 ‘약속의 땅’
정약용·성 정하상 등 조선교회 창립주역 고향
천주실의 읽으며 신앙 고백했던 상징 곳곳에
/ 여정 / 팔당역 옛 철길-마재성지-약종동산-새소리명당길-다산유적지-마재성지-운길산 역 옛 철길(3시간 30분 소요)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1~2).”

천지창조의 순간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던 거룩한 물 위처럼, 이 땅 위에도 거룩한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조선 후기 최초로 천주에 대한 신앙을 믿고 받아들였던 한국 천주교의 요람 마재성지다. 정약종, 정약용, 정약전, 정약현 등 나주 정씨 집안 형제들이 천주실의를 읽으며 거룩한 부르심에 답했던 한국 천주교 신앙 못자리 마재성지를 찾았다.

마재성지 전경

▶ 거룩한 부르심의 땅 마재

팔당역에서 옛 철길을 따라 50분가량 걸으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자리잡고 있는 마재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한국교회가 창설된 1784년 이전부터 하느님의 숨결이 닿아있던 한국 천주교 신앙 못자리다. 성 정하상(바오로), 성녀 정정혜(엘리사벳) 남매의 탄생지이자, 정약전,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정약용(세례자 요한) 형제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서 처음으로 천주실의 등 서학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초대 신앙 선조들이 한역 서학서를 읽고 공부하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고 고백했던 이곳 마재마을에 한옥 성전이 들어선 것은 2007년이다. 한강변 양지바른 땅에 들어선 한옥 성전 현판에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 성인의 신앙고백이 붙어있다. 보이지 않는 주님에 대한 모든 의심을 넘어, 보지 않고도 천주를 믿었던 나주 정씨 일가들의 행복한 신앙 고백을 상징하고 있다.

한옥 성전 안에는 은총 십자나무가 마련돼 있다. 도보 순례를 시작하기 전 이 곳 성전에 들러 묵상한 후 색종이에 기도지향을 적어 은총 십자나무에 봉헌할 수 있다. 월요일을 제외한 화요일~주일 오전 11시 봉헌되고 있는 미사에 참례해도 좋다. 한옥 성전 바로 앞은 약종동산이다. 경사 20도쯤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십자가의 길과 칼 십자가, 성모상과 마리아 십자가 등이 마련돼 있다. 겟세마니 동산과 골고타 언덕을 연상케 하는 약종동산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칼 십자가 앞이다. 옛 신앙 선조들이 고초를 겪었던 칼 모양의 십자가 형상 앞에 서면 둥근 금빛 거울 위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치는 순간이다.

마재성지 한옥성전 내 위치한 은총십자나무
마재성지 약종동산 칼 십자가. 칼 십자가 위에는 순례객의 기도가 담긴 십자가가 봉헌돼 있다.

▶ 하느님 영이 감도는 물가

마재성지 한옥 성전과 약종동산에서 기도와 묵상을 마친 후 물가로 향한다. 마재성지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 가면 한강변이 나온다. ‘다산길’이라 이름 붙은, 고요한 물길이 잔잔히 흐르는 강변길을 따라 걸으며 한국 땅에 처음으로 신앙이 움트던 당시 상황을 상상해본다. 서학이라는 낯선 학문과 ‘천주’라는 낯선 이름을 받아들이고 증거했던 그들의 선택과 용기 덕분에 지금 우리도 하느님을 알게 됐다는 감사함과 감격이 강바람과 함께 밀려든다.

30분쯤 걸었을까. 산길이다. 이 산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마을이 나타난다. 정약용 실학박물관과 여유당, 정약용 묘 등이 있는 다산 유적지가 있는 마을이다. 마재성지에서 강변길을 따라 걸으면 50분 남짓 걸리는 곳에 위치한 이곳 다산 유적지에는 ‘세례자 요한’이라는 천상 이름을 가진 다산 정약용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형제들과 함께 천주실의를 읽었고, 1784년 마재를 방문한 이벽과 배를 타고 상경하며 천주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던 다산은 천주를 배웠고 알았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1801년 2월 책롱사건으로 투옥됐고,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으며, 그 해 10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압송돼 조사받은 후 11월 강진으로 떠나는 등 18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이벽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라고 스스로 기록할 만큼, 천주교는 다산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일까. 다산유적지 곳곳이 마치 마재성지의 한 부분으로 느껴졌다.

마재성지에서 다산유적지로 향하는 강변길 코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고요한 물결이 아름다운 강변가다.
다산유적지 여유당 뒤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다산 정약용의 묘.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마재성지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성지로서의 기품을 갖추고 있는 듯 느껴지는 것은 나주 정씨 일가의 신앙 역사가 마을 곳곳에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산을 비롯한 나주 정씨 일가들은 순교와 유배로써 하느님을 증거했다. 정약종과 그의 부인 성녀 유소사(체칠리아), 세 자녀 정철상(가롤로), 성 정하상, 성녀 정정혜,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알렉시오)이 순교했고, 정약전과 약현의 딸 정난주(마리아), 정약용은 천주를 믿었다는 이유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이들은 모두 명실상부한 한국교회 신앙 선구자다.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음을 맞이한 정약전은 1779년, 일찍이 권철신(암브로시오)이 주도해 열린 주어사(走魚寺) 강학회에 참석해 이벽(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배웠고, 정약종은 최초의 한글교리서 「주교요지」를 저술하는 등 한국 천주교회 초대 교부이자 신학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현재 정약종은 그의 아들 정철상과 함께 주교회의시복시성위원회 선정 124위에 포함돼 있고, 그의 자녀 성 정하상과 성녀 정정혜, 부인 성녀 유소사는 이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순교자의 얼이 서려있는 마재마을 일대에는 봄 기운이 완연했다. 한국 땅에 처음으로 ‘천주’의 이름이 불리던 18세기부터 지금의 한옥 성전이 들어서기까지 200여 년의 시간 동안 굳건히 신앙 못자리를 지켜온 마재마을은 하느님의 영이 깃든 ‘약속의 땅’이었다.

※문의 031-576-5412 마재성지,

http://cafe.daum.net/majae33, http://www.nyj.go.kr

옛 철길 상세 지도(남양주 시청 홈페이지 내 다산길 코스 참조).

다산 정약용의 생가. 1925년 홍수로 소실됐던 것을 유적지 내에서 복원했다.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된 소박한 양반집의 모습이다.
마재성지 한옥성전 '도마성전' 앞에 위치한 작은 동산. 십자가의 길 14처와 칼 십자가, 마리아 십자가, 성모상 등이 놓여 있다.

마재성지 약종동산 십자가의 길 끝에 놓인 청동 예수님의 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끝낸 후 예수님의 발을 잡고 가시밭길 걸어가신 주님의 고통을 묵상해본다.
마재성지 약종동산 마리아 십자가. 십자가상 예수님 죽음을 지켰던 세 명의 마리아를 기억하며 제작한 것이다.

임양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