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대구대교구 100주년 특별기획 - 다시 읽는 드망즈 주교 일기] (48) 1937년 10월 9일~12월 6일

정리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11-03-23 수정일 2011-03-23 발행일 2011-03-27 제 2739호 8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오직 교구 위해 바쳤던 사랑
하느님 나라에서 계속 되리
건강악화로 고향 프랑스의 생 디에에서 요양 중이던 1930년 당시의 드망즈 주교. 드망즈 주교는 아무런 기반도 없었던 대구교구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오직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을 바쳤던 참된 목자였다.
1937년 12월 6일을 마지막으로 드망즈 주교의 일기는 끝을 맺는다. 일기의 마지막 장까지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성당을 축복하고, 사목순방을 진행했으며, 회람을 작성했다. 드망즈 주교는 쇠약해진 건강을 이유로 일기를 중단하고, 이듬해인 1938년 2월 9일 선종했다.

영·호남 교회의 초석을 닦은 대구대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 그 일기의 마지막은 담담했다. 마지막까지 교구 안에서 일상을 살았으며,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1937년 10월 9일~12월 6일

데클라 수녀가 대구에 부임한지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대성당의 회의실에서 있었다. 나는 거기서 훈화를 했다.

10일, 7시 성요셉성당(현 대구 남산본당의 옛 성당)을 축복했다.

11일, 복사 야고보와 함께 8시30분 버스로 출발, 청도읍에 견진성사를 주러 갔는데 아몽 신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5시에 귀환. 자동차로 5시간30분이 걸렸다.

16일, 오후 2시30분 기차로 김천으로 떠났다. 기온이 이상하게 떨어졌다.

19일, 상주성당(현 안동교구 상주 서문동본당의 옛 성당)을 축복했고 물미, 표석동, 예천 거쳐 안동 도착.

25일, 안동에서 대구까지 105km. 자동차로 2시간30분 걸렸다.

26일, (개신교 병원의) 손 의사와 권 의사가 근 2개월이 계속된 배 통증을 진찰했다. 그것은 심한 장염과 항문의 병해이다. 간장도 충혈돼 있었다.

11월 2일, 12월 18일에 있을 부제 서품자의 청원이 있었다.

12월 6일, 다음 해를 위한 강연의 프로그램과 무엇보다도 ‘주일강론집’의 발간을 알리는 회람 제125호를 보냈다.

병으로 일기가 중단됐다. 이에 관해서는 ‘교구 통신문’을 참조할 것.

상주성당(현 안동교구 상주 서문동성당) 봉헌식 기념사진(1937년 10월 19일).현 성당은 6·25 직후 재건축된 것이다.

■ ‘다시 읽는 드망즈 주교 일기’는…

일제 억압의 현실에도

한국교회 초석 닦았던

40년 복음화업적 담아

드망즈 주교의 일기는 1937년 12월 6일자로 끝을 맺고 있다.

자신의 업무일지와 감정, 사진 자료 등을 고스란히 담은 이 일기는 드망즈 주교의 쇠약해진 체력으로 인해 이어질 수 없었다.

결국 드망즈 주교는 이때의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듬해인 1938년 2월 9일, 63세의 나이로 대구대교구의 곁을 떠났다. 한국에 입국하여 40년 동안을, 대구대교구 초대교구장으로 임명돼 27년 동안을 물심양면으로 일해 오다 선종한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98년 입국해 본당 주임으로, 서울 용산신학교 교수로, 경향신문 사장으로, 대구대교구 초대교구장으로, 가톨릭신문을 창간한 사람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왔던 그는 한국교회의 초석을 닦은 선구자였다.

특히 그가 남기고 간 일기는 일제 강점기에 놓여있던 한국교회와 우리나라의 현실, 대구뿐 아니라 대구에서 분리된 전주·광주·부산·마산·안동·제주 등 영·호남 교회의 초기 교회사가 모두 담긴 중요한 자료였다.

드망즈 주교의 묘. 대구대교구 성직자묘지에 안장됐다.

정리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