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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순교자를 증언한다 (10) 모범적 전교회장 강유선 요셉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0-10-29 수정일 2010-10-29 발행일 1999-10-24 제 217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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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구 전교사로 왕성한 활동
주교좌성당 인민군에 양도 반대로 김필현 신부 등과 함께 행방불명
일찍부터 전교사로 유명했던 강유선 요셉은 일생을 교회 일에 헌신하다 끝내는 북한 공산당에 체포돼 신앙의 증거자가 됐다.
일찍부터 전교사로 유명했던 모범적 전교회장 강유선(요셉)은 일생을 교회사업에 헌신하다 끝내는 북한 공산당에게 체포돼 신앙의 증거자가 됐다.

강요셉이 북한 공산당에게 끌려간 것은 1949년 6월, 김필현 신부, 최항준 신부와 함께 소환장을 가져온 정치보위부원을 따라 시 인민위원회로 나선 것을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됐다.

49년 노골적으로 박해 시작

북한 정권은 1949년부터 천주교회에 노공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해 5월 7일 덕원교구장 신(辛) 주교를 비롯한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 전원을 체포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했으며 이를 항의하는 평양교구 홍용호 주교를 14일 납치했다.

북한교회는 일제히 교회 활동이 정지될 초비상 상태였고 본당마다 신부를 잃지 않으려는 긴장 속에 6월 10일 예견했던 대로 시 인민위원회 명의로 된 소환장을 가진 정치보위부원이 관후리 주교좌 성당 문제를 핑계로 김필현 신부를 연행하고자 했다.

김신부는 당시 교구청 경리 담당인 최항준 신부와 함께 기성회 상임이사인 강유선과 상의 끝에 세 명이 함께 정치보위부원을 따라 시 인민위원회로 갔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강요셉의 희생은 그가 교구의 관후리성당 부지에 주교좌 성당을 세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북한 교회는 광복을 맞아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 활동이 활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1946년 평양교구는 평양시로부터 되찾은 관루히 성당 부지에 주교좌 성당을 세울 평양 교구사업 기성회를 조직했고 강요셉은 바로 기성회의 상임이사로 선임돼 총책임자인 김필현 신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교구 내 본당과 공소를 누비면서 건축 기금 모금에 최선을 기울였다.

당시 성당 건축 공사는 오로지 교구 신자들의 도움에 의존했기 때문에 건축비 마련과 인력 동원 문제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온갖 노력으로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런데 대성당 외곽이 완성되고 종각이 세워질 무렵인 1948년 말 평양시 인민위원회는 건축 중인 주교좌 성당을 양도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이로 인해 김필현 신부와 기성회 임원들은 수없이 인민위원회에 불려 다녀야 했다.

결국 천주교회에 대한 탄압이 노골화 되고 여러 명의 성직자들이 납치됐으며 그런 와중에 강요셉과 김필편 신부, 최항준 신부가 함께 소환돼 행방불명된 것이다.

어려서 한학문을 서당에서 조금 배웠을 뿐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는 굳은 신앙심과 성실성, 총명함으로 평양교구에서 전교사로 발탁됐다.

1930년을 전후해 마산본당 일을 돌보고 있을 때 전교사로 발탁된 그는 언어소통 문제 등 어려움을 겪고 있던 메리놀회 신부들을 도왔다.

문화사업에도 앞장

메리놀회 신부들은 언어 문제와 문화의 상이함으로 인해 사목과 전교활동에 어려움을 겪음에 따라 지역별로 한국인 전교사들을 채용하고 있었다.

강요셉은 1928년부터 순안, 서포, 순천, 숙천, 영유 등지를 순회하며 전교사로서의 임무를 착실하게 이행해 모범적인 전교회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또 가톨릭의 문화 사업에도 앞장서 1932년 평양 관후리 성당의 신심단체인 가톨릭소년단(보이스카웃) 창단에 최삼준 회장과 함께 동참해 적극적인 활동으로 크게 기여했다.

강요셉은 일본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순천농회 서기로 근무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교회 일에 몸바쳐 일했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교회 일을 하다가 두 명의 신부와 함께 북한 공산당에게 희생된 것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