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이야기 교회사] (8) 고난을 딛고 일어서다 Ⅰ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8-11 수정일 2010-08-11 발행일 2010-08-15 제 2709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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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처럼 번져나가는 가톨릭교회
진리에 대한 확신·애덕실천 등 신앙인들 삶을 통해 복음 전파
네로 황제, 정치 위기 모면 위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시작
들불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들판에 번지는 불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작가 유현종(1940~)의 「들불」은 동학농민들의 분노였지만, 초세기 가톨릭교회의 ‘들불’은 그 누구도 꺼트릴 수 없는 신앙의 기운이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로마 제국의 변방, 예루살렘에서 일어선 가톨릭교회는 200년경에 들어서면서 제국 곳곳으로 침투했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로마 제국 전체 인구의 10%가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는 상황이 됐다. 계층도 지식인에서부터 부유한 상인, 서민, 노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례적이었다. 사실 가톨릭교회는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이질적인 종교였다. 당시 사람들은 종교라면 당연히 섬길 대상으로서의 신상(神像)과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엎드려 절할 신상이 없었다. 그리고 종교 창시자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했다. 마치, 비밀스런 사교 집단처럼 비쳐졌다. 게다가 바오로 사도가 우려해야 했을 정도로 종교 내부에서의 남녀 역할 구분도 모호했다(1티모 2,9-15 참조).

이런 종교가 어떻게 들불의 기운을 탈 수 있었을까. 가장 확실한 홍보효과는 역시 확신에 찬 신앙인들의 삶이었다. 신앙인들은 참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당시 사회로선 보기 드물게 도덕적이었다. 교회는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았으며, 병자와 일할 능력이 없는 이들, 전쟁 포로, 노예들과 늘 함께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애덕실천이 개별적이 아닌, 공동체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신앙인들은 복음 정신에 따라 사랑을 실천했으며 이러한 사랑의 증거는 당시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또한 진리는 어디다 끼워 맞춰도 모두 아귀가 맞는 법이다. 가톨릭교회는 당시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었던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비합리적이고 신화적 세계관에 염증을 느낀 당시의 일부 지식인들이 가톨릭신앙에 높은 관심을 보인 이유다.

여기에 당시 세계 판도도 신앙 전파에 한몫했다. 예수가 만약 조금만 더 빨리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가톨릭신앙은 그렇게 순식간에 유럽과 아시아를 휩쓸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이제 막 로마의 기운이 하늘을 찌르고 있을 때였다. 언어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통일되어 있었고,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었다. 로마 제국 내에선 어디서나 제약 없는 활발한 무역 활동이 이뤄지고 있었다. 인류가 통일 제국을 형성하고 부흥하던 그 시기에 교회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체적인 조직정비도 착착 이뤄졌다. 시대 불문, 장소 불문, 사람이 늘어나면 반드시 ‘룰’이 생겨난다. 2세기 중반에는 주교직을 포함한, 교회 조직의 기본 틀이 확립됐다. 또 로마 교회의 우위성에 대한 전통 또한 정립됐다. 사람이 모이는 단체라면 모두 ‘본산(本山)’이라는 개념이 있는 법이다. 산맥이 있다면 수많은 산들을 거느리는 머리 산이 있다. 오늘날 몇몇 대형 개신교회에서도 모(母) 교회가 있고, 그 모 교회가 지방 및 지역 성전들을 거느리고 있다.

초기 교회 당시 신앙인들도 로마 가톨릭교회 역사가 가장 오래된 만큼 우위권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로마 교회는 베드로와 바오로에 의해 발전하고 뿌리내린 교회가 아닌가. 그래서 로마 교회의 주교는 베드로 사도를 계승한다고 생각했다.

승승장구(乘勝長驅)였다. 아무도 그 기운을 막을 수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다. 중국 금(金)나라 때 동해원(董解元)이 지은 「서상」(西廂)에 “참으로 이른바 좋은 시기는 얻기 어렵고, 좋은 일을 이루려면 많은 풍파를 겪어야 한다”(眞所謂佳期難得, 好事多魔)는 구절이 있다.

이제 교회가 그 풍파 한가운데 놓인다. 공권력에 의한 본격적인 박해의 시기가 도래한다. 첫 박해는 유대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바리사이파를 질타하고 율법의 해체와 재구성을 말한 예수는 유대교를 근간에서부터 뒤흔들었던 인물이다. 그만큼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물과 기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반감이 곧 유대교를 넘어 로마 제국 전체로 확산된다.

로마 공권력에 의한 첫 박해는 네로(재위 54~68) 황제에 의해 이뤄졌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로마에서 대화제가 발생했을 때 백성들 사이에선 황제가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졌다. 황제가 건설하려는 왕궁의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정확한 방화범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네로가 정치적 위기 상황에 직면한 것만은 틀림없다. 네로는 이 위기를 넘기 위해 그리스도교인들을 이용한다. 네로 입장에서 보면 이 생각을 떠올린 것은 참으로 절묘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유는 이렇다.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후 44년) 이후 로마에선 황제들에 대한 신격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황제는 신이었다. 그래서 모든 주민들은 황제에게 바치는 제의에 참여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제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의 눈에 그리스도교인들은 편협한 이들로 비쳐졌다. 당시 로마인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법하다.

“나도 아폴로 신을 믿고, 아테네 신을 믿는다. 나도 믿는 신앙이 있다. 그런데도 황제의 신상에 절한다. 너희들(가톨릭 신앙인들)은 왜 너희들의 신만 고집하느냐. 왜 그렇게 사회와 융화되지 못하는가.”

더 나아가 실제로 당시 민중들 사이에선 가톨릭교회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가 만연했다. 성찬례는 사람을 제물로 쓴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함께 모이는 예배 행위를 두고 로마인들은 근친상간의 패륜을 저지른다고 수군거렸다. 오락이나 유희를 멀리하는 금욕주의적 태도들도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승승장구였다. 아무도 들불처럼 번지는 신앙의 불길을 막을 수 없을 듯 보였다. ‘좋은 일을 이루려면 많은 풍파를 겪어야 한다’(好事多魔)고 했다. 이제 교회가 그 풍파 한 가운데 놓인다. 공권력에 의한 박해의 시기가 도래한다. 그림은 베드로 사도의 순교를 묘사한 이탈리아 화가 조르다노의 작품.
신자들은 십자가에 매달렸고, 불에 태워졌다. 또 어떤 이들은 맹수의 밥이 됐다. 전설에 따르면 이때 베드로 사도도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됐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박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로 황제의 박해 때는 교회의 지도자급만 잡혀가 목숨을 잃었을 뿐이다. 나머지 신자들은 숨어서 그나마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가톨릭 신앙생활 = 죽음’의 시기가 온다.

로마 제국 최초의 대규모 박해가 일어났다. 서기 250년의 일이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