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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7고 묵상] (3) 제3고(苦) “주어진 십자가를 주저하지 않고 메다”

권선형 기자
입력일 2010-02-24 수정일 2010-02-24 발행일 2010-02-28 제 2686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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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십자가 메고 어려운 이와 함께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재임하던 1965년 9월 논설위원들과 회의를 갖고 있는 김 추기경(가운데).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에게는 냉혹할 만큼 철저했지만 상대방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자신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한 평생 착한 사제로 살아가길 원했지만, 그러한 잣대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에게 밝은 웃음을 전했고, 모두를 품는 포용력이 있었으며, 그와 함께한 이들은 희망을 꿈꿨다.

그는 인간적 판단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 좋지 않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항상 교회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사제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참아야 했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만 하는 자리였다. 그는 그렇게 묵묵히 십자가를 메고 걸었다.

1963년 11월, 독일로 유학을 떠난 지 7년 만에 사제 김수환은 귀국길에 오른다. 부푼 꿈을 안고 유학을 떠났지만 힘겨운 전공 공부, 지도교수의 공백 등의 난관에 부딪힌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 사목에 전념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다. 신학과 사회학 그리고 ‘한국 가족 제도’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까지….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그에겐 너무 버거운 십자가였다.

10년을 넘겨도 학위를 받지 못할 것 같은 상황에서 무작정 책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교회 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는 길은 독일에서 보고 배운 것을 사목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이라는 소임이 주어졌다. 신문사의 현실은 너무나 열악했다. 10명이 채 안 되는 기자와 영업직원들이 만성 적자에 시달리면서 근근이 신문을 찍어내는 실정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소임, 열악한 환경 등 쉽지 않은 현실에서도 그는 주저하지 않고 십자가를 양 어깨에 짊어진다. 그는 주어진 일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열정을 쏟아부으며 일을 찾아 나서서 했다. 직접 기사를 작성했으며 광고를 섭외하고 홍보활동까지 했다. 1인 3, 4역을 수행한 것이다. 밀린 신문 구독료를 받기 위해 직접 각 성당을 찾아다녔다. 한 번은 구독료를 받으러 들른 한 성당에서 잡상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열정으로 가득했던 가톨릭신문 사장 김수환은 후에 이렇게 소회했다.

“가톨릭신문에서 소임을 다한 1964~66년의 2년 동안은 밥 먹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일에 미쳐 살았습니다. 밤을 새워 가며 기사를 작성하고, 매번 신문이 인쇄돼 나오면 마치 작가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공들인 작품을 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제 일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교회 일에 매달린 때 가운데 하나가 가톨릭신문 재임 시절이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소임에 대한 그의 순종과 열정 때문이었을까. 그는 평생 사제로 살아가면서 가장 큰 영향을 가톨릭신문 사장 재임 시절에 겪는다.

첫 번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다. 김 추기경은 가톨릭신문을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소식을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전한다. 그는 가톨릭신문 1964년 9월 20일자를 통해 9월 14일 열린 제3회기 공의회의 소식을 전했다. 특히 2면 사설을 통해서 ‘공의회 성공 기원하는 우리의 정신자세’라는 제목으로 신자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세계적인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공의회는 이로써 결정적인 단계에 들어섰다. 왜냐하면 이번 공의회는 중심 테마인 교회에 대한 의안을 비롯하여 교회일치에 관한 문제 같은 중요한 의안들이 상정돼 있기 때문이다. … 그만큼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인류와 세계를 위해서까지 지대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그것은 깜깜한 밤하늘에 돌연히 빛을 발하는 불기둥과도 같이 어두운 인류 역사의 진로를 밝혀주는 것이 될 것이다.”

이후 김 추기경은 10월 25일자 신문에는 ‘회의 진행 급 핏치’라는 제목으로 공의회를 다뤘으며, 12월 13일자와 제4회기가 열리던 1965년 9월 5일자 등에도 보도기사와 함께 공의회 전망에 대한 기사를 상·중·하로 자세히 실었다.

김 추기경이 재직했던 2년 동안 가톨릭신문에 지속적으로 드러난 공의회 관련 기사들은 그가 공의회의 중요성에 대해 얼마나 강조했는지를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같은 열정은 한국교회가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어졌고, 신문 기사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김 추기경은 가톨릭교회 안으로 한정되다시피 하던 필진을 개신교회들은 물론 타 종단에까지 개방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강원룡 목사, 이상근 목사, 성공회 노대영 신부 등 개신교 저명인사들의 글이 지면에 등장하는가 하면 비신자들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목소리라면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교회 일치를 강조한 공의회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이렇게 가톨릭신문 사장 시절 한국교회에 전해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후 그가 사목 방향을 결정하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준 또 다른 사건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경험한 ‘원체험’이었다. 그는 신문사의 바쁜 일정에도 일요일만 되면 교도소에 가서 미사를 봉헌했으며, 부활절과 성탄절에는 간식을 마련해 보내주곤 했다. 김 추기경은 특히 사형집행에 참관하고 올 때면 며칠 밤을 잠 못 이뤘다고 한다. 주일미사나 고해성사 때 재소자들을 대하고 있으면 순백의 영혼 같은 천사를 만나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고 했다.

김 추기경은 이렇게 재소자 시설, 행려인 보호시설 희망원, 한센씨병 정착촌 등 소외된 사람들과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그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이러한 이끌림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커졌다. 그들에게 어떻게든 힘이 되어 주고 싶어 직접 돈을 구해 전해준 일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톨릭신문사 사장 김수환은 행려인 보호시설이었던 희망원에 발길이 부쩍 잦아진 스스로를 발견한다.

‘이들이야말로 예수님 사랑을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이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분의 사랑을 증거해야지 왜 머뭇거리고 있는가. 그런데 이들과 똑같이 먹고 자면서 살아갈 용기가 있는가.’

사제 김수환이 경험한 원체험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느낀 이 같은 체험은 후에 평생동안 사제로 살아가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는 그렇게 늘 소외된 이웃과 함께 있었고, 힘든 고난과 역경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았다.

1957년 독일의 탄광촌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뒷줄 가운데)과 현장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독일 유학시절인 1963년 6월 독일 오베르 성당에서 미사 참례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뒷줄 맨 왼쪽).
김 추기경은 행려인 보호시설인 희망원을 자주 찾았다. 사진은 1983년 2월 김 추기경이 예고도 없이 대구 희망원을 방문해 원생들을 격려하는 모습.

권선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