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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18)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원주·춘천교구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12-08 수정일 2009-12-08 발행일 2009-12-13 제 2676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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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졸려 순교할 때 피어오른 한 줄기 빛”
홍인(레오)은 포천 지역에 복음 전파에 노력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체포돼 그의 아버지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한양으로 압송됐다.(탁희성작)
원주 감영 선화당의 모습. 1815년 5월 김강이는 아우와 함께 이곳으로 이송됐고 12월 5일 옥사했다.
서지 마을 전경. 최해성의 집안은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으로 이주, 작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원주 옥터는 최 비르지타가 신앙을 증거하다 옥리들이 목을 졸라 죽인 순교의 현장이다.
강원도 혹은 인근지역인 원주교구와 춘천교구에서도 박해의 칼날은 피해가지 못했다. 원주교구에서는 하느님의 종 3명이, 춘천교구에서는 하느님의 종 1명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각각 순교했다.

▧ 원주교구 하느님의 종

원주교구 지역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으로는 우선 ▲김강이(시몬)을 꼽을 수 있다. 충청도 서산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풍요로웠던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고산을 방문하자 교리를 배운 김강이는 등짐장사를 하며 여러 곳으로 이주해 다녔다. 하지만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경상도 진보의 머루산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일구다가 강원도 울진에 가서 정착했다.

1815년 경상도에서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옛 하인의 밀고로 김강이는 아우와 함께 안동에 수감됐다. 이때 그는 포졸들이 빼앗은 자신의 재물을 돌려줄 것을 관장에게 요청해 돌려받았으며, 그 재물을 옥중 교우들에게 나눠줬다고 전해진다.

5월, 아우와 함께 자신이 살던 강원도 원주로 이송된 김강이는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과 인내로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형벌로 인한 상처가 깊었던 그는 사형이 집행되기도 전 옥사하고 말았다. 1815년 12월 5일 그의 나이 50세 이상이었다.

▲최해성(요한)은 1839년 순교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먼 친척이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운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서지(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 2리)로 이주했고 교우촌을 이뤘다.

성격이 온순하고 정직했던 최해성은 곧 마을의 회장으로 임명됐다. 견진성사를 받은 후에는 성령칠은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징표가 나타났으며 그의 마음은 순교 원의로 가득 찼다고 전해진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해성은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포졸들이 쇠도리깨로 마구 때리며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강요해 피투성이가 됐지만 그는 결코 대답하지 않았다.

최양업 신부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56년 9월 13일자 서한을 보면, 최해성은 관장 앞으로 끌려간 후에도 “원주고을을 다 주신다 해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839년 9월 6일 2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최해성을 조카로 둔 ▲최 비르지타 또한 원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이다. 최해성이 체포되자 조카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감옥으로 갔다가 관원들에게 발각됐다.

관원들이 최 비르지타에게 신분을 묻고 천주교 신자인지를 묻자, 그는 “그렇습니다. 틀림없는 교우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관원은 그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했다.

관원은 최 비르지타가 굴복하지 않자 굶겨 죽이라는 명령을 했으나 네 달 동안이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다시 화가 난 관원은 ‘3일 안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옥리들은 3일 안에는 최 비르지타를 굶겨 죽일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날 밤 옥으로 들어가 목을 졸라 죽였으니 1839년 12월 8일과 9일 사이의 일이다. 그가 순교한 뒤, 옥리의 어머니는 옥에 갇혀 있던 한 교우를 찾아가 말했다고 한다.

“비르지타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습니다.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일 때 그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거든요.”

▧ 춘천교구 하느님의 종

1801년 한양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홍인(레오)의 부친이다.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오히려 부친보다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입교를 망설이는 부친을 설득해 신앙으로 이끌기까지 했다.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홍인은 부친과 함께 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노력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체포된 부자는 한양으로 압송됐으며, 아버지 홍교만은 한양에서, 아들 홍인은 포천(춘천교구)으로 이송돼 참수 당했다. 1802년 1월 30일 홍인의 나이 44세의 일이었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