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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16)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전주교구 ①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11-24 수정일 2009-11-24 발행일 2009-11-29 제 2674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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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권상연·유항검 등 24명 순교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 유항검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탁희성 작). 유항검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전주로 옮겨져 처형당했다.
전주교구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은 24명으로 서울대교구 지역을 제외한 가장 많은 수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특히 이 지역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124위를 대표하는 윤지충(바오로)이 순교한 곳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며 김제에서 1명, 무장에서 1명이 순교했다.

▧ 윤지충과 가족들

▲윤지충(바오로)은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첫 번째로 참수된 순교자(1791년 12월 8일 순교)다.

그는 1759년 전라도 진산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783년 봄 진사시험에 합격하기도 했다. 이 무렵 고종사촌 정약용(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눈뜨게 됐으며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후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이후 윤지충은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프란치스코), 이종 사촌 ▲권상연(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쳤으며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도 왕래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그는 권상연과 함께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에 대한 소문은 조정에까지 퍼져 소란스럽게 해 얼마 후,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군수에게 내려졌다. 그들은 피신했지만 진산군수가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곧바로 자수했다.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했다.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혹독한 형벌을 받아냈다. 당시 전라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당시 그들의 굳은 믿음을 보여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했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1791년 12월 8일, 윤지충은 32세의 나이로, 권상연은 40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다. 그들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시신이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선명한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또 ‘구베아 주교가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1979년 8월 15일자 편지’를 보면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에 적셨으며, 이중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냈고 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 유항검의 가족들

윤지충의 인척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해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됐다.

유항검의 신앙답게 그의 가족 또한 대부분 전주교구 지역 하느님의 종에 포함됐다. 1801년 순교한 하느님의 종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다음 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조카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였으므로 유항검의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대상이었다. 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유항검은 이후 교회의 가르침을 이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789년 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으로 파견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했으며, 1790년 제사 금지령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아 체포됐다가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기도 했다.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하도록 요청하려는 주 신부의 계획을 앞장서서 돕는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유항검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가장 먼저 체포된다. 한양으로 압송된 그는 순교를 각오하고 어떠한 잔인한 형벌에도 입을 열지 않았으며 결국 모반죄로 전주로 옮겨져 처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의 일이다.

전주 숲정이 성지. 유항검 가족을 시작으로 이곳에서 순교자들의 처형이 이어졌다한다.
윤지충·권상연이 참수형을 당한 자리에는 전동성당이 들어섰다. 사진은 전동성당에 있는 윤지충·권상연 동상.
유항검 일가 합장묘가 있는 전주 치명자산 성지. 유항검 일가는 가매장됐다가 1914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