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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우들 보아라 -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열세 번째 서한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11-11 수정일 2009-11-11 발행일 2009-11-15 제 2672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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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겪는 조선 교우 어려움 자세히 전달
“작은 교우촌 사는 신자 가족들은 거처할 움막 하나 짓기도 어렵고 성사 받기 위해 하루 110리 걸어야”
열세 번째 서한에 대하여

최양업은 1857년에만 두 통의 편지를 썼는데 하나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하나는 리브와 신부에게 보냈다.

서한을 작성한 불무골은 현 충남 서천군 판교면 흥림리, 전북 부안군 산내면 중계리, 충북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 등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이 서한에서 페롱 권 신부의 입국 소식(3월 13일)과 다블뤼 신부의 주교 서품식(3월 25일) 등을 기쁨에 넘쳐 전하고 있다.

1857년 9월 14일 불무골

최양업은 3월 입국한 페롱 신부와 많이 친숙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대하던 신부들의 서한을 페롱 신부에게서 받았고, 직접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르그레즈와 신부를 통해 이미 페롱 신부에 대해 들었고, 페롱 신부도 최양업의 외로운 처지를 알고 있어 ‘우정’이 싹텄다고 이야기한다.

최양업은 자신이 수집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다블뤼 주교에게 전했으며, 다블뤼 주교가 전반적 역사를 편찬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것이 다블뤼 주교가 편찬한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의 바탕이 되는 셈이다.

이 편지에서 최양업은 또다시 조선 교우들의 상황과 교우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가련한 몇 가족이 사는 작은 교우촌이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금방 이사를 와서 아직 거처할 만한 움막 하나도 짓지 못했고, 공소집을 마련할 시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 신자 가족들은 모두가 성사를 받기 위해 만산(현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구운리)으로 와야 했습니다. (중략) 이 연약한 무리가 단지 하루 사이에 110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꼭두새벽에 집을 떠나 반 이상 되는 곳에 있는 어떤 촌락을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그 마을의 장정 20여 명이 지팡이와 몽둥이를 갖고 나타나 어린 처녀와 소녀들을 겁탈하려 덤벼들었습니다.”

최양업은 신자들이 다행히 구출돼 공소집에 도착했다는 것과 자신이 얼마만한 기쁨과 연민의 정으로 맞이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렸는지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또 새롭게 입교한 한 청년의 이야기와 마귀로 인해 괴롭힘 당하던 한 가족을 교우촌으로 인도해 지금은 잘 살고 있는 일, 한 마을 전체가 개종한 일 등 많은 소식을 전한다.

최양업은 되도록 많은 조선의 상황과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교우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참된 목자였다.

그는 교우들을 언제나 ‘불쌍하다’고 표현했다.

“신부님께서 이제 제가 부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제게 보내주신 많은 성물을, 페롱 신부님이 갖고 오시다가 불행하게도 외인 거룻배에서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페롱 신부도 저도 가난뱅이가 돼 버렸습니다. 그런데 성물들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교우들의 요구를 달랠 방도가 없습니다. (중략) 이제 편지를 끝내면서 또 다시 저와 우리 불쌍한 교우들을 신부님의 신심 깊은 기도에 맡깁니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