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정리 서상덕·권선형 기자
입력일 2009-10-28 수정일 2009-10-28 발행일 2009-11-01 제 2670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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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안중근의 삶·정신 새롭게 조명
‘한국의 모세’, ‘한국의 바오로’라 불리는 안중근 토마스. 신앙인 안중근이 이 땅의 가난한 백성과 나누고자 했던 삶, 조선 교우들과 더불어 살고자 했던 ‘천주님의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짧은 32년의 삶에 담긴 그리스도인 안중근의 삶과 정신의 궤적을 좇는 행사가 열렸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가 10월 22일 고려대학교100주년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마련한 ‘안중근 의사 하얼빈의거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는 파편적으로 알려져 온 안중근 토마스의 면모를 새롭게 돌아보게 한 자리였다. 하지만 이날 행사도 퍼즐맞히기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 같아 아쉬움을 남겼다.

이날 행사에서 나온 주요 발표문을 통해 신앙인 안중근의 삶과 정신을 새롭게 돌아보는 장을 마련한다.

■안중근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 현황과 과제 - 발제자 : 조 광 교수(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안중근 관련 연구성과 보급 노력 필요

오늘날 우리 학계는 안중근 연구에 있어서 적지 않은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안중근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료에 대한 철저한 조사간행 및 기존의 연구에 대한 반성적 접근이 요청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기여했던 주요한 인물들의 전집 내지는 사료집들은 거의가 간행됐지만 그들이 역할모델로 삼았던 안중근 전집 내지 연구자료집은 아직 본격적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안중근기념사업회 부설 안중근연구소에서 안중근 자료를 집대성한 자료집 간행을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안중근 관계 자료 가운데 현재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상당수며 안중근 자신이 직접 작성한 기록도 그다지 많지 않다. 또한 그의 사형이 조기에 집행됨에 따라 옥중에서도 충분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안중근의 전집은 그가 직접 작성한 글들로만 채워질 수는 없다. 그의 전집은 일반적인 전집 편찬 형식과는 달리 그의 공판기록과 그에 관한 각종 자료 및 회고록 기록까지도 총망라돼야 할 것이다. 아울러 안중근 연구의 심화를 위해서는 안중근의 의거뿐만 아니라 그의 애국계몽운동 및 의병투쟁에 대해서도 좀 더 천착되어야 한다. 또한 안중근의 정치, 사회사상 등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연구의 출현이 기대되고 있다.

특히 당대 일본의 평화론을 비롯한 20세기 초에 전지구적 범위에서 성행했던 평화사상과의 관련성에 대한 그의 동양평화론은 더욱 기대되는 분야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진행된 안중근 관계 작업들 가운데 일부에서는 안중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해줄 수 있는 것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안중근에 관한 연구성과의 올바른 보급을 위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과 사상적 성격 - 발제자 : 김동원 신부(중국 다롄 한인본당 주임)

평화의 사도로 국제협력 구축 앞장

안중근이 청소년기 체험한 천명(天命)의식과 함께 중요한 관념은 친구관계를 중시한 의리관념이다.

천명관념은 천주교의 신을 받아들이는 신앙적 기초를 제공했고 의리관념은 민족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행동하게 하는 정의감으로 발전된다.

또한 가정에서의 일상적인 교육으로 뿌리박혀 있던 유가의 충효사상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중요한 신념체계로서 천주교 신앙을 통해서 애국항일운동의 중요한 동기로 작용한다.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 형성에 영향을 준 책은 예수회 중국 선교사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 스페인 출신의 중국 선교사 판토하 신부의 「칠극(七克)」 등이다.

옥중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안 의사는 자신이 설파한 교리의 첫머리에 ‘장생불사의 음식’으로 성체를 내세우면서 성체의 신비를 민족을 구원하는 길로 역사 안에서 구체화하는 신앙을 보여준다.

안중근에 있어 보편종교로서 천주교 신앙은 항상 민족과 나라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었으니 신앙심과 애국심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안중근의 내면에서 조우한 유가사상과 천주교 신앙은 당시의 국제 정세 안에서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발전, 확대되어 간다.

안중근은 민족이 나라의 존엄과 독립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민족이 지니고 있는 교만병으로 인한 것이며 교만으로 인해 개인이 단합하지 못하고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며 결국 나라가 분열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안 의사 사상의 두 축은 정의와 평화다. 그는 정의의 사도로 민족의 존엄을 짓밟는 불의를 응징하고, 평화의 사도로서 국제적인 협력체계를 세우려 했다.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황해도 천주교회 - 발제자 : 원재연 연구실장(수원교회사연구소)

황해도 중심으로 인권·선교운동 전개

안중근이 정하상의 「상재상서」나 정약종의 「주교요지」를 직접 읽고 교리 지식을 심화하고 확대해갔음은 틀림없고 그런 점에서 안중근이 두 사람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이 처한 환경은 너무나 다르다.

안중근은 한국교회 창설 직후부터 유교적 지식을 지닌 양반층들을 대상으로 전교할 때 인용해온 보유론적(補儒論的) 전교방식으로 전교활동에 임했다. 비유로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는 그의 교리 방식은 모두 「주교요지」 이후 조선에서 토착화된 것이었다.

안중근이 영혼을 하느님께서 부여해주신 불가침한 신성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은 인권의 소중함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우덕순 의사와의 굳건한 우애를 고려해본다면 안 의사는 매우 개방적인 종교관과 구원관을 지니고 있었다.안중근 의사의 인권의식은 초기 개개인의 경제적 이권 또는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사안을 해결사처럼 풀어보려는 소영웅주의적 경향에서 차츰 교육과 식산흥업, 국채보상운동 등과 같은 애국계몽운동 영역으로 발전해갔고,침내는 그 한계성을 절감하여 모든 것을 청산하고 일제의 군사력을 몰아내기 위한 의병전쟁, 의열투쟁에 나서게 했다.

안 의사가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한 교회 내 인권운동과 선교활동은 신앙심과 혼연일체를 이룬 애국심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개화된 문명국가, 자주독립국가를 이루는 것이었다.

안 의사의 활동상은 황해도 청계동에 있던 친척과 친지 등 지역 신자들에게 애국심과 항일의식을 심어주었으며, 인권사상을 신장시켜 나가는데 영향을 끼쳤다.

■안중근 의사와 빌렘 신부 - 발제자 : 조현범 연구실장(한국교회사연구소)

빌렘신부, 고해성사 위해 네차례 방문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 갇혀있을 때, 빌렘 신부는 3월 8일부터 11일까지 4일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안 의사를 접견했다.

빌렘 신부는 둘째 날 고백성사를 주었고, 셋째 날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해 빌렘 신부는 당시 청계동 신자들과는 판이한 반응을 보였다.

조선인들의 민족적인 감정은 이해하지만,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그렇게 잘못한 일은 없으며, 오히려 그로 인해 근대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빌렘 신부가 안 의사를 찾아간 것은 조선인들의 반일의식이나 민족 감정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안 의사가 마지막으로 성사를 받기 원했기 때문에 사제로서 사목적 배려차원에서 결행한 일이었다.

빌렘 신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 조선 문제는 일본이 철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지만, 당시 일본이 보이는 압도적인 무력을 인정한다면 철수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빌렘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던 무렵부터 철저히 친일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고, 안 의사에게 동정을 보낼 때조차도 일본에 저항하는 조선인의 애국주의를 위로해줌으로써 일본의 통치가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빌렘 신부는 안 의사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친밀한 우애 내지 애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코 조선인들의 반일 민족운동에 공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 후로도 계속 유지됐으며, 일본이 극동아시아에서 압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현실로 인정하는 자세를 취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구상 - 발제자 : 김형목(한국독립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시대 앞선 선각자로 진정한 동양평화 제시

일제의 대륙침략과 러시아 남하정책이 추진되는 긴장 속에서 동양평화론은 한국 독립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이었다.

동양평화론을 집필한 주요 배경은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안 의사는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토를 포살한 것이 아니며 의병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임을 분명히했다.

동양평화론은 집필한 목적과 집필 배경을 언급한 ‘서언’, 일제의 침략전쟁에 따른 동양평화가 유지되지 못하는 원인을 다룬 ‘전감’ 등 총 5부분으로 구성됐지만, 서언과 전감 일부만이 저술된 채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은 그들의 침략상이 만천하에 폭로되는 것을 우려해 형집행 연기라는 약속을 어기고 사형을 단행해버렸다. ‘정취서’에서는 그의 현실인식과 동양평화를 위한 다양한 방법론을 보여준다.

안중근은 동양평화 유지 방안으로 세계 각국의 신뢰회복, 평화회의 정착과 원활한 운영을 위한 공동군대 조직, 3국간 재정적인 지원과 협력 모색을 제시했다. 동양 3국간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둔 인식론은 시대를 앞선 선각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국공영론이나 삼국동맹론 차원을 넘어서 진정한 동양 평화를 제시한 사실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동아시아 공동체론 - 발제자 : 손 열 교수(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한·중·일 평화회의 구축 강조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러시아의 침략과 일본의 독점적 지위를 견제하는 이중의 고민 속에서 내놓은 것으로 일본을 품는 지역질서를 꿈꾸고 있다.

안중근은 한국, 중국, 일본은 형제같은 나라니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지적하며, 동양의 중심지이자 항구도시인 여순을 개방하여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고 각국의 대표를 파견해 평화회의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이를 위해 3국의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여 평화군을 양성할 것, 3국 공동은행설립·공용화폐 발행으로 금융·경제면에서 공동발전을 도모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른바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지역협력질서 구상을 밝히고 있는데, 근대한국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진전된 구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의 이런 지역구상 이면에는 당시 일본이 주도한 지역인식, 구상, 전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청일전쟁을 동양의 구문명대 일본의 신문명의 전쟁으로 규정하며 지역패권의 첫 발을 내딛은 일본은 이후 그들이 원하는 ‘인종’을 매개로한 새로운 지역재편을 꾀했다.

이후에도 일본은 그들이 원하는 지역을 구성하기 위한 ‘지역인자’를 찾으려 끊임없이 경주해왔다.

일본은 현재에도 다른 내용의 다른 지역인자의 공동체론을 내놓고 있다. 민주당 대표인 오자와는 과거 자민당의 노나카 히로무 등 보수본류세력과 유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동아시아의 동맹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한정되어 있으며 아시아와 진정한 화해를 위해 역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도 상대적으로 약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역사문제를 안고 동아시아의 실천적인 선구자로 뛰기는 불가능하다.

■안중근의 한중일 인식 - 발제자 : 현광호 박사(고려대 강사)

한국민 존엄위해 국가존립 강조

안중근은 근본적으로 인명이 가장 귀중하다고 인식했고 국가를 인민의 생명을 보호해주는 도구로 인식했다.

또한 안중근은 한국사에서보다는 천주교의 인간평등, 개화사상의 천부인권설 등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 인민의 존엄성을 보호해줄 국가의 존립을 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안중근은 한국이 독자적 개혁으로 진보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보다 신속한 진보를 위해서는 근대적 개혁을 이룬바 있는 일본의 지원을 기대했다.

또 그는 일본의 지도층과 인민을 분리해 사고했고 일본 인민들의 다수는 평화를 희망한다고 확신했다. 안중근은 중국이 과거의 중화사상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국민의 단결력이 결여되어 부국강병에 실패했다고 인식했다.

한·중·일 삼국은 세계에서 형제국 같은 사이라고 지적하면서 서양열강으로부터 동양을 수호하려면 지리적으로 인접한 황인종 국가들이 협력해야 한다고 봤다.

그가 동아시아 협력론에 공감한 것은 삼국이 문화적으로 비슷하고, 특히 유교문화권이라는 것을 중시한 것으로 보여진다.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 발제자 : 윤선자 교수(전남대 사학과)

안중근 사업, 국제평화 차원서 추진해야

해방 후 한반도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안중근의 기념사업은 갈수록 다양화·확산화됐다. 1960년대 초까지는 그의 순국일에 추모행사를 열었고, 196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까지 안중근의사기념관 설립, 안중근 유묵의 보물지정 등 국가적인 차원의 기념사업이 진행됐다.

안중근을 살인자로 단죄했던 천주교도 신앙인 안중근으로 인식하고,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부터 안중근 기념사업은 매우 활발하게 추진됐다.

문화인물과 호국인물로 선정됐고, 유해발굴작업이 남북 공동으로 추진되기도 했다. 천주교회에서는 신앙인 안중근, 애국적인 안중근 의거라는 측면에 초점을 모았다. 안중근 기념사업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화·확산된 것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의 동양평화사상과 의거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동안 안중근 기념사업은 일회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고 사후 관리 또한 미흡했다.

안중근 기념사업은 안중근의 정신을 미래화하는, 안중근 의거를 국제평화의 측면에서 자리매김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순국일이나 의거일에 행해지는 많은 기념식은 자칫 의례적인 행사로 전락할 수 있다. 따라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충분한 숙고·조사를 통해 추진해야 할 것이다.

정리 서상덕·권선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