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검은 대륙에 핀 생명의 꽃 - 아프리카 잠비아 선교 현장을 가다 (6)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9-10-21 수정일 2009-10-21 발행일 2009-10-25 제 2669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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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낮은 곳에 임하소서…”
하이디 브라우크만 수녀. 1966년부터 한국에서 30여 년간 봉사자로 헌신하다 지금은 아프리카로 건너가 사랑을 전하고 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산 너머 산, 또 산…. 그래도 눈물을 쏟긴 처음이었다. 독일의 가톨릭사회복지단체 문을 나설 때였다. 유달리 까다로운 질문과 면박을 주는듯한 직원의 태도를 모두 참았건만, 결국 후원을 못 받을지 모른다는 암담함이 스쳐갔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세계 곳곳의 복지기관에 끊임없이 편지를 써 보내야 했다. 직접 찾아가 설명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었다. 그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싶을 뿐인데, 정말 이렇게까지 구걸하며 다녀야 하나? 병원을 꼭 지어야 하나? 후배 수녀들이 심심찮게 물어왔던 질문들을 도리어 자신에게 던졌다.

그러나 대답은 하나, “그래도 해야 한다”였다.

하이디 브라우크만 수녀(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녀회 창설자·한국명 백혜득·65)의 이러한 결단으로 수많은 눈물방울과 땀방울들이 한데 뭉쳐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더불어 사는 삶의 디딤돌이 됐다.

아프리카 잠비아의 척박한 부쉬. 누구도 그곳에 길을 내고 병원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이디 수녀가 아프리카 진출에 대한 계획을 말하자 후배 수녀들조차 혀를 찰 정도였다. 가진 것 없는 수녀들의 삶에선 너무나 이상적인 계획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프리카 선교활동이 그 무엇보다 뛰어난 선견지명과 사랑의 실천이었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한다.

지난 1966년, 아직은 앳된 모습도 엿보이는 22살 젊은 수녀가 한국을 찾았다. 봉사의 열정과 낯선 나라에 대한 설익은 기대가 교차했다. 하이디 수녀는 봉헌의 삶을 살고자 결심하면서 아프리카를 가고 싶었지만, 수녀회는 그를 나라 이름조차 생소한 한국으로 보냈다.

하이디 수녀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청계천이었다. 악취와 더러움에 숨쉬기조차 힘겨웠다. 대학생 몇몇과 이른바 ‘하꼬방’이라고 불리는 판잣집 작은 방에서 야학을 시작했다. 구두닦이와 날품팔이로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런데 청계천을 오갈 때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우리 아이가 아파요’였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간호대학에 입학했다. 언어 장벽으로 의과대학 공부는 어려울 것 같아 선택한 길이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교수는 그에게 의대로 갈 것을 권했다.

당시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의사 수녀. 낮엔 병원에서 일하고 밤과 주말에는 판자촌으로 무료봉사를 다니는 바쁜 일과를 이어갔다.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녀회’ 창설은 가난한 결핵환자들을 돌보다가 결심하게 됐다.

하이디 수녀는 틈만 나면 빈민촌에 진료를 나갔고,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 가난한 이들을 병원에 들였다. 하지만 하이디 수녀가 소속된 수녀회에선 그가 병원일에만 더욱 전념해주길 바랐다.

오랜 묵상 시간이 이어졌다. 더욱 낮은 곳에서 일할 수도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끊임없이 다가왔지만, 기존에 수녀회가 제공하던 안정된 체계와 친구들을 모두 버리고 혼자 설 용기는 나질 않았다. 그때 초대 원주교구장인 지학순 주교의 격려는 큰 힘이 됐다.

단돈 1원도 없이 오직 하느님만 곁에 모시고 살았다. 수도자로 살고 싶어 기존 수녀회를 나왔고, 수도자로 살고 싶어 새로운 수녀회를 창설했다. 벌써 26년 전 일이다. 진료소(원주 가톨릭병원)를 열고, 수도자를 양성하고, 그렇게 시작된 작은 뜻은 현재 350여 명의 수도회원들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30여 년 후,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바람이 현실로 다가왔다.

하이디 수녀는 지금까지 받아왔던 도움을 아프리카인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다행히 한국 신자들은 이제 ‘받는 교회’가 아닌 ‘나누는 교회’를 구현하는데 적극적이었다.

하이디 수녀는 청진기나 메스가 아닌 한 자루의 펜을 가장 먼저 들었다. 우선 도면을 그렸다. 건축가도 실내디자이너도 아니었지만, 의사로서의 오랜 진료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효율적인 반경의 진료소 도면을 그려냈다. 그리곤 후배수녀들과 힘을 합쳐 흙을 파고 벽돌을 쌓았다. 나무를 베고 침대 하나를 짜기 위해서도 잠비아인들에게 수많은 그림을 그려줬다. 잠비아 선교지의 모든 성당과 건물은 하나같이 수녀들이 직접 설계하고, 꾸몄다.

땀부 지역에 세운 루위병원은 수녀회의 대표적인 의료 활동 거점이다. 한가운데 성당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진료실과 입원실은 환자들의 편의와 의료진들의 행동반경을 최대한 고려해 지은 건물이다. 입원실을 더 갖추기 위해 2층 건물을 구상하기도 했지만 계단이 뭔지도 모르고, 기술도 없는 잠비아인들과 2층까지 올리긴 무리였다.

병원 문을 열었지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꽤나 컸다. 편안한 침상까지는 어떻게 해볼 수 있었지만, 환자복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옷가지 한 벌 제대로 갖추지 못한 환자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약품과 먹을거리 걱정도 끊이질 않았다. 그래도 이 병원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누구나 따스한 환대를 받고 돌아간다. 그것은 하이디 수녀의 첫 번째 목표였다.

바로 이 루위병원 옆에는 현재 간호학교가 지어지고 있다. 이 학교는 하이디 수녀가 오랜 시간 품어온 또 다른 꿈인 잠비아 의과대학 설립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다. 제2, 제3의 잠비아인 슈바이처와 나이팅게일이 이곳에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디 수녀의 뜻을 열배 백배로 구현해온 후배 수녀들 덕분에 잠비아에서 수녀회의 활동은 최고 모범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잠비아 주교회의가 이탈리아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짓고 있는 가톨릭병원도 수녀회가 위탁운영하게 됐다.

지난해 수녀회 설립 25주년을 맞아 총원장직을 인계한 하이디 수녀의 근황은 더욱 바쁘다. 수녀회와 수도회가 진출해 있는 세계 곳곳의 선교지역을 다니며 진료활동을 하고, 현지인 수도자 양성을 지원한다. 복음화를 위해서는 각국 교회의 신앙적 자립을 돕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언제 하느님께서 부르실지 모르는 나이가 되었다며 남은 힘과 시간은 수도자들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돕는데 쓰고자 한다.

하이디 수녀는 ‘그 수녀회의 외국인 있잖아요. 그분 누구죠?’하는 질문을 받아도 여전히 ‘그분’이 자신을 지칭하는 줄을 모른다. 자신이 외국인이란 생각조차 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걸까요?’라고 순진하게 반문하는 벽안의 수녀. 모국인 독일에서 산 기간보다 한국에서 두 배를 더 살아온 하이디 수녀는 오늘도 청진기를 들고 척박한 오지를 종종걸음으로 오간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봉사자’여야 합니다. 봉사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 잠비아 선교활동에 도움주실 분

: 우리은행 111-318370-13-001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녀회(02-773-0796~7)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