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2. 성 필립보 네리 ③

우광호
입력일 2009-08-26 수정일 2009-08-26 발행일 2009-08-30 제 2662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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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3세와 ‘교회 바로 세우기’ 나서
정기적으로 40시간 성체조배 이후 선행 실천
가난한 이들 돕는 단체 설립…36세에 사제품
애덕 실천으로 ‘가톨릭 교회’ 인식 바꿔 
그림은 필립보 네리가 교황 클레멘스 8세를 치유하는 모습.
순조롭게 항해하던 배가 태풍을 만났다. 세상이 요동치고 있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우왕좌왕했다.

필립보 네리가 살던 시대는 그야말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시대였다. 교회의 중심, 로마는 더더욱 그랬다. 여기서 잠깐, 필립보가 처한 당시 시대상황에 대해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필립보의 행동과 처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갈등과 고민, 결단 배경 등을 알기 위해선 당시 정치 및 국제 정세를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 프랑스의 장 칼뱅, 스위스의 쯔빙글리, 영국의 헨리 8세 국왕…. 당시 유럽은 종교 분열의 시대였다. ‘유럽=가톨릭 교회’라는 등식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됐다. 수많은 이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저버리기 시작했다. 15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가톨릭교회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절대적 권위는 무너졌으며, 너도나도 교회를 이탈해 나갔다. 가톨릭교회는 위기감을 느낀다. 아니, 큰 충격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톨릭교회는 쇄신과 개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개혁 움직임은 마르틴 루터의 분열 훨씬 이전부터 있었지만, 교회의 1500년 완고함으로 인해 그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개혁을 늦출 수 없었다. 분열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그리스도의 정통적 가르침마저 소멸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중심에 교황 바오로 3세가 있었다. 1534년 교황직에 오른 바오로 3세 교황은 이단에 대처하고, 각 나라 왕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이슬람 세력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엄청난 땀을 흘렸다. 무엇보다도 트렌트 공의회를 개최, ‘교회 바로 세우기’에 적극 나섰다.

바오로 3세 교황은 훌륭한 선장이었다. 큰 배는 급작스런 방향 전환을 시도할 경우, 전복될 수 있다. 바오로 3세 교황은 커다랗게 곡선을 그리며 배를 안전하게 선회시킨다. 이럴 경우 배의 속도를 줄일 필요도 없다. 편안하고 무리 없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험난한 항해는 훌륭한 선장만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배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예상치 못했던 산호초 혹은 암초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선 능숙한 선원이 필요하다. 당시 로마에 살았던 필립보는 훌륭한 선장을 도와서 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최고의 선원이었다. 당시 교회가 험난한 시기를 뚫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필립보와 같은 능숙한 선원들 역할이 컸다.

필립보의 활동은 로마 거리나 교회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는 특히 애덕 실천에 열심이었다. 그는 가정이나 병원, 노숙인 수용소 등을 찾아가 병자들을 돌보았다. 또 모금운동도 전개했다.

필립보는 이때 몇몇 사람들의 힘만으로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신앙을 도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만든 단체가 ‘가장 거룩한 삼위일체회’다. 필립보는 회원들에게 “기도생활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순례자들과 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가장 거룩한 삼위일체회’의 기도생활은 주로 성체 신심이 중심이었다. 정기적으로 40시간의 성시간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기도 후에는 반드시 소외된 이웃을 찾아 나섰다.

이러한 필립보의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려 했던 사람도 필립보를 보며,‘가톨릭교회에도 역시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필립보는 “가톨릭교회에는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역시 하느님은 가톨릭교회에 계신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필립보는 당시 교회에 있어서 보배와 같은 존재였다.

필립보 네리는 개혁을 말로만 외치지 않았다. 직접 생활과 실천을 통해 교회를 개혁했다. 40시간의 성체조배가 끝나면 필립보는 작은 종을 울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기도 시간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선행을 베풀어야 할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필립보는 이렇게 17년을 로마에서 살았다. 이제 로마 사람이라면 필립보의 뛰어난 영성과 사랑 실천을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사제가 아니었다. 필립보의 나이는 벌써 36세 였다.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 필립보의 영적 지도 신부였던 페르시아노 로사 신부가 어느 날 필립보를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되면 더욱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학업, 영성, 인품 등 이미 사제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췄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사제 서품을 받읍시다.”

필립보는 처음에는 겸손히 사양했지만 결국 주위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필립보는 1555년 5월 23일 파리오네에 있는 성 토마스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부자 청년’이 사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늦깎이 필립보 네리 신부의 사제생활은 매우 특이했다.
트렌트 공의회의 제1차 회기(1545-1549) 모습을 담은 그림.

우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