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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우들 보아라 -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일곱 번째 서한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08-19 수정일 2009-08-19 발행일 2009-08-23 제 266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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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은 지독히도 가난하며 박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 일곱 번째 서한에 대하여

최양업 신부의 일곱 번째 서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서한 머리에 ‘도앙골에서, 1850년 10월 1일’이라고 밝혀 놓았다는 점이다.

여섯 번째 서한이 ‘상해에서, 1849년 5월 12일’임을 미루어 볼 때, 일 년여 만에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차례 조선 입국에 실패하며 큰 아픔을 삼켜야 했던 그가 조선 입국 후 얼마나 기뻐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최양업이 서한을 작성한 ‘도앙골’은 현재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1리로 추정되고 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김 루카 등이 이곳에서 체포돼 공주에서 순교했다.

■ 도앙골에서, 1850년 10월 1일

최양업의 일곱 번째 서한은 분량이 길다. 아마도 조선 입국 과정과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승 신부에게 전하다 보니 길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섯 번째 서한을 썼던 상해를 떠나 요동으로 왔으며 당시 만주교구장 직무대행 베르뇌 신부의 명령에 따라 성무를 수행했다고 밝힌다. 이후 그는 매스트르 신부와 변문을 통해 조선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페레올 주교가 보낸 밀사들을 만난다. 그가 묘사한 조선 입국 과정은 실로 눈물겹다.

“저에게는 관문 경비 초소의 경계망을 들키지 않게 피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고 체포될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밤중에 관문 경비 초소에 다가갔습니다.(중략) 그러나 그날 밤은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고 게다가 광풍이 참으로 거세게 불었으며, 혹독한 추위에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습니다.”

날씨 때문에 제대로 경비를 서지 않은 경비병들의 눈을 따돌린 최양업은 서울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이후 그는 전라도에서 공소 순방을 시작, 6개월 동안 5개도(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도로 추정)를 돌아다녔다고 전한다.

최양업은 서한에서 9개월 동안의 사목활동을 바탕으로 조선교회의 다양한 면을 자세히 보고한다. 교우들의 참혹한 실상을 목격한 그는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로 심정을 대신하고 있다.

“저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포들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들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들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는 불쌍한 처지에 놓인 교우들을 위해 몰래 성사를 집전해준 사례들을 계속해서 전한다.

“신자들은 성물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이 불 같습니다. 상본이나 고상이나 성패를 장만하기 위해서는 아끼는 것이 없습니다.(중략) 그러니 만일 신부님께서 성물을 살 만한 여분의 돈이 있으시면 얼마간의 크고 작은 십자고상과 성패와 상본 등을 사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최양업 신부가 일곱 번째 서한을 작성한 도앙골 교우촌의 현재 모습.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