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정영식 신부의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71) 은총과 더불어 나아가기 ⑥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입력일 2009-07-22 수정일 2009-07-22 발행일 2009-07-26 제 2658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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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발산하며 생생히 주님 체험하라
지난주에 침묵(silence), 형성(지향)적인 읽기(formative reading), 묵상적인 성찰(meditative reflection)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주는 기도(prayer)와 관상(contemplation), 활동(action)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대부분의 신자들은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 정도로 알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기도는 ‘대화’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도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우리가 어떤 한 사건에 접했을 때,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 속에서 잠깐 침묵 속에 머물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기도다. 그 머묾 속에서 영적 독서를 하는 것도 기도다. 그 영적 독서의 내용을 깊게 생각하는 것도 기도며, 그 성찰 속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도 기도다.

사실 우리의 삶 하나하나가 기도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기도와 연결되어 있다. 삶은 그 자체로 기도를 요청한다. 나의 삶이 기도로 정향되도록 하느님께서 이미 설계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존재 자체가 살아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관상은 기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관상은 살아계신, 사랑 깊으신 무한하신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이다. 우리는 일상 삶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다양한 장해물들을 만난다. 어떤 이들에겐 그 장해물이 돈이 될 수도 있고, 성격적 결함, 이기심, 유별난 질투심 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관상은 이런 장해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과 친밀한 만남을 이뤄가는 도정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과 친해진다는 것은 결국 그 상황에서 하느님 뜻과 합치하는 관상을 통해 ‘이미 거기에 있는’ 은총과 더불어 나아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그분의 길을 이끌어 가실 수 있도록 하는 가운데, 우리 창조자의 손 안에서 유순해지게 된다. 여기서 유순해진다는 것은 공손하게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흔쾌히 ‘예’라고 대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관상, 즉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은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관상의 결과는 활동이다. 그리스도의 제자 신분과 활동에 맞갖게 우리를 준비시켜 주는 것이다.

앞에서 관상은 선물이라고 했다. 앞에서 설명한 침묵과 형성(지향)적인 읽기, 묵상적인 성찰, 그리고 기도와 같은 수련들과 관상이라는 선물, 이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깊이를 전달할 수 있게 해 준다. 간단하게 말하면 활동하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침묵과 묵상, 기도, 관상이 활동과 연관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뒤집어 말하면 활동이 없는,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는 침묵과 묵상, 기도, 관상은 진정한 의미의 침묵과 묵상, 기도, 관상이 아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는 그 활동은 더욱더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이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결과로 드러나는 사랑의 열매가 다시 하느님과의 친교를 더욱 긴밀히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우리가 우리의 삶과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받아온 그 사랑을 발산하는 가운데 전보다 한층 더 충실한 하느님의 도구들이 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사랑을 발산하는 가운데 전보다 한층 더 충실한 하느님의 보화들이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예”라고 말할 것인지, “아니요”라고 말할 것인지 생각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루하루를 대충 내가 가진 지식 몇 가지, 판단 몇 가지에 의지해서 나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살면 소중한 인생을 헛되게 보내게 된다. 이런 삶 속에선 은총과 더불어 흘러가는 삶을 살기 힘들게 된다. 은총과 더불어 살아가면 매일의 삶이 활기에 넘치게 된다. 하느님은 무기력한 분이 아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활기차신 분인지를 생생하게 체험해야 한다. 생생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멋진 삶을 열어갈 수 있다.

짜지도 맵지도 않은 음식은 먹기 힘들다. 혹시 나의 삶이 맵지도 짜지도 않은 그런 삶은 아닐까. 나의 삶이 맛도 멋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런 삶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