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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정진석 대주교는 누구인가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09-06-25 수정일 2009-06-25 발행일 1998-06-07 제 2105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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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ㆍ소탈한 성격에 포용력 갖춘 큰 그릇
너그럽고 겸손하며 후덕한 인격자
일처리는 적극적 “정중동(靜中動)의 표상”
저서 23권 번역서 13권 낸 저술가
정진석(니콜라오) 대주교는 너그럽고 겸손하며 후덕한 인격자로 널리 알려진 분. 상대방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또 할 것 없어』라고 말할 정도로 항상 온화하며 소탈한 분이지만 미래지향적 통찰력을 가지고 일 처리에 있어선 늘 적극적이고 결단력있게 추진해와 교계내에서 「정중동」(靜中動)의 표상으로 인정돼 왔다.

「한국 천주교회 최고의 교회법 석학」인 정진석 대주교는 39세의 나이로 주교품을 받고 교구장이 된 「한국 천주교회 최연소 주교」 기록도 갖고 있다.

정진석 대주교는 또한 지극한 「효자」로 소문난 분. 1931년 12월7일 부친 정원모(갈리스도)씨와 모친 이복순(루시아)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3~4세 당시 만주 여순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부친의 급서로 편모 슬하에서 외아들로 성장했다. 로마 유학시절을 제외하고 어머니를 평생 모시고 산 정 대주교는 말년에 노환으로 음성 꽃동네 인곡 자애병원에 요양중이던 모친이 『아들 주교가 지금 책을 쓰고 있을까? 기도하고 있을까?』하는 말을 전해 듣고 그 즉시 눈물을 머금으며 병문안을 다녀오는가 하면 『죽으면 필요한 사람에게 안구를 기증하라』는 모친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구를 꺼내는 수술 현장을 지켜보고, 지금도 매일 어머니와 모든 연령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만큼 효심이 깊다.

모친 이복순 여사가 태몽으로 『아들이 주교가 되는 꿈을 꾼 것』도 널리 알려진 일화중의 하나이다. 『한 사제가 와서 어머니 어머니 나 주교 됐어 하고 깨워 놀라 벌떡 일어나니 꿈이었다』는 이복순 여사는 정 주교의 주교수품식 때 『감사 감사 감사』하며 실신, 사제관에 누워 있었는데 정주교가 『어머니 어머니 나 주교됐어』하며 깨워 태몽이 현실이 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정진석 대주교는 「믿음과 영혼」에 대한 깨침을 얻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께 신부가 되겠다는 말을 못해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그는 6ㆍ25를 경험하면서 대학을 중퇴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1961년 3월 18일 사제품을 받았다.

1970년 6월 25일 청주교구장으로 임명. 그해 10월3일 주교품을 받고 교구장에 착좌한 정 주교는 그가 품을 준 첫 사제인 김유철 신부에게 신학생 양성의 사명을 줘 교구장 착좌 당시 6명에 불과하던 한국인 사제 수를 재임 28년만에 100여명으로 늘렸다.

정 주교의 사목적 통찰력은 『이상과 현실을 그리스도의 정신 안에서 조화시키고 실천해 나갈 것』이란 주교 서품식 인사말에 이미 드러났었다. 28년간 청주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정진석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가장 높은 지역 복음화율과 신자대비 본당수, 신자대비 사제수가 많은 기록을 남겼다.

정진석 대주교는 또 저명한 저술가로 정평이 나 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저술과 번역 활동을 해온 정진석 주교는 23권의 저술과 13권의 번역서를 냈다(8면 참조)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