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목체험기] 이틀간의 자유인/조해인 신부

조해인 신부·의정부 녹양동 이주노동자상담소장
입력일 2009-05-26 수정일 2009-05-26 발행일 2009-05-31 제 2650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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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살 때 아버지를 잃고, 자라면서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책임이 컸다. 한국에 온 것도 홀어머니와 세 형제를 위해서다. 여기에 와서도 모든 것을 줄여서 동생의 결혼을 위해 돈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이것은 가족을 위한 것이기에 기뻤다.

2003년 한국에 와서 8개월간 일해서 송출업체에 1590불의 돈을 갚으면서 공장을 나왔다. 이로써 시작된 미등록노동자, 소위 불법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다. 마음대로 밖을 나다닐 수 없었다.

외출을 해도 잡힐 것을 걱정하면서 빨리 공장으로 들어가야 했고 화려한 시내를 마음 놓고 걸을 수도 없었다. 그저 정해진 목적지를 빠른 시간에 잡히지 않고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쉬는 날이 있어도 미등록노동자이기에 제한을 받았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처지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이젠 지쳤다. 그래, 돌아가자. 그런데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을까? 여권의 유효기간이 지났는데….’

대사관에 들어서기 전에 마음이 몹시 뛰었다. “쿵쾅 쿵쾅” 나를 잡으려는 출입국 직원들의 발자국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가슴을 진정시키며 들어간 대사관에서 대사님과 계획에도 없었는데 마주쳤다.

사업장을 이탈해서 불법체류했다고 대사님에게 꾸지람을 들었을 때, 순간, 못가는 것이 아닐까? 임시 여권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눈물이 나려고 했다. 상담소에서 미리 연락을 해 주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대사님께서 당신도 속상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사를 만나서 임시 여권으로 쓸 증명서를 받았다. 미등록 체류자에서 이제 출국을 위한 서류를 받은 것이다. 그 순간 주마등처럼 3년이라는 시간이 스쳐지나 가면서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힌다.

그래도 불행했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일한 경험, 많은 좋은 한국 사람을 만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속티다’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고 지금 내 옆에 그가 있어서 정말 기쁘다.

대사관을 나와서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거리와 사람들이 이제 달라 보였다. 함께 걷는 속티다도 달라 보였다. 이제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자격이 주는 자유로움, 고개를 숙이지 않고, 움츠리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자유로움, 그리고 잡혀서 ‘속티다’와 헤어지거나 하지 않아도 되고 이제 함께 돌아가서 결혼을 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쁘다.

*‘로타나’, ‘속티다’와 함께 대사관에 동행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을 조해인 신부가 구성해서 씀. 두 사람은 무사히 고향으로 갔습니다.

조해인 신부·의정부 녹양동 이주노동자상담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