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정일우 신부(예수회)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9-05-13 수정일 2009-05-13 발행일 2009-05-17 제 2648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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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에 위로·희망되어 주신 분
교구 빈민사목위 신설해 교회 철거민 사목 기반 마련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픈 열망 이루지 못해 늘 고민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양평동 철거민촌을 방문하고 있다(1977년 4월 7일). 추기경은 여러 차례 철거민들을 방문해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눴다.
정일우 신부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싶지 않겠다는 마음만큼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김 추기경이 항상 먼저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대상이었다. 정일우 신부(예수회·John V. Daly·73).

그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복음을 살고픈 마음 하나로 1973년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갔다.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진짜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말이 아니라 그저 살았다. 판자촌에 발을 내디딘 첫 해 만난 ‘정구’(고 제정구 의원)와는 둘도 없이 막역한 친구가 되어 판자촌에서 함께 살았다. 서울 곳곳의 판자촌을 전전하며 강제철거에 맞서 도시빈민운동 등을 펼치며 사랑의 열기를 모락모락 피워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약 10년간 김 추기경의 영적 지도 신부라는 수식어도 달고 살았다.

정 신부는 이야기한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고 시간을 나누는 것이라고.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음입니다.”

그의 기억 속 김 추기경은 아무리 바쁘고 힘든 시간이라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 와주는 성직자였다. 정 신부의 ‘보증인’이었고, ‘영성의 배경’이었고, ‘그냥 겸손한 분’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정 신부와 ‘정구’를 사랑해준 분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처음 뵌 때가 언제였는지, 어디서였는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1975년 정구와 같이 서울 양평동 판자촌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때, 김 추기경님의 배려로 약 7개월간 명동본당 보좌신부로 살았던 것이 가장 또렷한 기억의 시작이다.

명동본당 보좌로 살던 어느 날 추기경님을 찾아뵙곤 양평동 판잣집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추기경님은 “아주 좋다”고 하셨다.

하지만 당시는 판자촌에 산다는 이유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려 잡혀가던 시절이었다. 정구와 각각 ‘양심선언’을 써서 냉큼 추기경님께 내밀었다. 행여 어처구니없는 구속 사태 등을 막기 위해 보증을 서달라는 요청이었다. 김 추기경님은 두말없이 나와 정구의 실제적인 보증인이 되어 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양평동 판자촌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김 추기경님은 양평동 판자촌이 철거될 때까지 몇 차례나 오셔서 미사를 주례해주셨다. 다섯 평 남짓한 ‘예수회 복음자리’ 공간에 간판을 걸 때도, 그 복음자리가 철거될 때에도 함께 해주셨다. 어린 꼬마들과 주민들이 좁은 방에서 서로 무릎을 맞대고 앉은 채 미사를 드릴 때 추기경님은 “철거를 목전에 둔 여러분을 볼 때 나 역시 마음이 어둡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려움을 통해서 더 큰 기쁨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자. 다른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여러분 보다 많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여러분은 가난하기에 가장 소중한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더욱 가까이 느끼고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렇게 따스하게 대해 주시던 김 추기경님께 어느 날은 화가 나서 달려갔다.

양평동 철거 당시, 주민들이 이주할 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도대체 철거민들이 살만한 땅을 찾을 수가 없었다. 땅이 너무 비싸 국민들이 살 곳이 없었다. 돈 있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다 자기들 것으로 만들어둔 땅만 넘쳐났다. 그나마 쓸 만한 땅도 나중에 개발이익을 보겠다고 팔지 않았다. 무자비한 대한민국과 강제철거와 마주하면서 나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김 추기경님을 찾아가 따지듯 물었다. “도대체 이 나라에 국민이라는 존재가 있기나 하는 겁니까?”

그런 내 모습에 깜짝 놀란 김 추기경님이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 이주할 땅을 살 돈을 후원받을 수 있도록 즉시 독일교회 해외지원단체를 소개해주셨다. 이주할 곳을 찾느라 헤매는 주민들을 위해 행정당국에 편의도 부탁해주셨다.

“당시 신부님께서 철거민들을 이끌고 양평동 판자촌을 떠나는 모습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찾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김 추기경님께 전해들은 말이었다. 추기경님은 판자촌 주민들이 경기도 시흥군으로 집단이주해 집을 짓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직접 오셔서 격려해주셨다. 주민들 곁에 와서 표현해주시는 위로와 격려는 그 무엇보다 큰 힘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자 재개발로 인한 철거가 연이어졌다. 수많은 산동네는 철거바람에 몸살을 앓아야 했다. 그 가운데 아파 울부짖는 철거민들 곁에서 추기경님은 미사를 봉헌하며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자신을 내어주셨다. 또 88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강제철거가 극에 달하자 서울대교구에 도시빈민사목위원회를 설치해 교회가 철거민들의 아픔에 보다 능동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하셨다.

김 추기경님은 갖가지 공석에서 축사 등을 하실 때가 참 많았는데, 내가 강하게 기억하는 말씀이 있었다.

“삶의 자리! 이보다 더 근본적이요 최소한의 요구가 있겠는가.”

1989년 6월에 열린 아시아 도시빈민대회장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삶의 자리 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존재할 자리가 없는데 인간의 권리를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정부와 대기업 또는 어떤 개인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집 없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호화주택을 짓거나 가질 권리가 없습니다. 모든 이를 위해 최소한의 삶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김 추기경님이 어떤 분이셨나 생각해보면 그저 한마디만 떠오른다. ‘겸손하신 분.’ 김 추기경님은 말 그대로 그냥 겸손하셨다.

그러한 인간적인 면들은 평소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되레 일반 사람들이 추기경님을 만나면 잔뜩 긴장했다. 추기경님은 그저 편안히 인간적인 만남을 가지셨는데. 추기경이니까 어깨에 힘 좀 넣어도 되련만,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겸손하시다’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트레이닝복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눈에 띄게 허름한 내 옷차림도 개의치 않고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셨다.

특히 김 추기경님은 나와 정구를 참 좋아하고 사랑해주셨다.

정구는 추기경님을 보고 ‘아버지’ 같다는 말을 하곤 했다. 추기경님은 늘 자기를 지켜봐 주시는 분으로 느낀다고 했다. 1986년, 정구랑 내가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고 돌아올 때였다. 마침 아시아주교회의 회의가 일본에서 열리고 있어서 우리 둘은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서 김 추기경님께 인사를 드렸다. 추기경님은 우리의 수상을 너무 기뻐하시면서 회의에 참석하신 아시아 주교님들 한 분 한 분께 일일이 소개를 시켜주시는 게 아닌가. 그때의 모습은 정말 친아버지와 같았다. 그리고 그날 밤 도쿄의 어느 선술집에서 술 한 잔을 사주시며 축하인사를 해주셨다. 여느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내 영성이 깊어지는 것도 김 추기경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기경님은 나의 영성의 배경이었다. 그분의 겸손이나 나에 대한 사랑은 내게 든든한 배경이었고, 큰 도움이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시고 다가와 위로와 희망이 되시는 모습에서 참 빛이 났다. 그분에 가슴 속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물씬 느껴졌다.

복음적으로 가난하게 살려는 열망이 참 크신 분이었는데. 어디를 가나 ‘추기경’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테고, 머무르던 주교관을 떠나면 비서도 데리고 가야 하고, 늘 줄을 잇는 손님들을 위한 주차장도 있어야 하고…. 그런저런 제약으로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가고 싶은 열망대로 살지 못해 늘 고민하는 분이었다.

김 추기경님과 만난 세월이 쌓여가면서 나는 추기경님이 마음으로 참 가난한 분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다. 마음으로 가난한 것이 청빈한 삶인데, 청빈의 마음으로 당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삶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 열망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성직자들이 물질에 욕심을 내면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갈 수가 없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은 두렵고 겁이 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추기경님은 오히려 가난한 이들 곁으로 가는 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면서 부끄러워하셨다. “추기경이라는 직책 때문이 아니라 솔직히 용기가 없어서 가지 못했다”라고 고백하셨다.

김 추기경님은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겸손하게 고백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복음적 삶을 향한 김 추기경님의 열망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정리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