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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이 땅에 빛을] (11) 조선에 복음의 꽃을, 외국인 선교사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04-29 수정일 2009-04-29 발행일 2009-05-03 제 2646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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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역만리 조선에 복음의 꽃 피우기 위해…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탁희성 작). 1839년 기해박해 당시 교우들이 다칠까 염려하여 스스로 자수해 모방·샤스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 모방 신부(탁희성 작). 최양업·최방제·김대건 세 학생을 마카오로 보내 최초의 한국인 사제가 탄생하는 데 공헌했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탁희성 작). 배론에 한국 최초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교회서적 인쇄소를 설치하는 등 활발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10여 년 동안 수집한 자로로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한 다블뤼 주교(탁희성 작).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03위 성인 중 외국인 선교사는 꼭 10명이다. 모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이들은 이역만리의 멀고 먼 땅, 조선에 복음의 꽃을 피우기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채소 따위로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외롭고 고된 길이지만 참된 목자가 되어 조선 교우들과 온갖 역경을 함께한 그들은 교우들의 순교 행렬에도 동참하며 하느님을 증거했다. 하느님 안에 국경은 없다.

▧ 조선의 복음화(花)를 꽃피우다

조선교구가 설정된 후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이가 바로 ▲앵베르 주교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도착한 모방, 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선교 체제를 갖췄으며, 1839년 당시 신자수는 9천 명 이상으로 헤아려진다.

앵베르 주교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뜻을 둬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사제로 키우고자 했으나 박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체포됐다.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조선에 입국한 지 2년 만에 순교한다.

앵베르 주교보다 앞서 입국한 ▲모방 신부는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해 순교한 신부다. 1836년 입국,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앵베르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했다.

그는 1836년 2월 최양업, 3월 최방제, 7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 당시 35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온 지 3년9개월만에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모방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는 ▲샤스탕 신부다. 1836년 12월 조선에 입국해 한국말을 배우고 각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그의 나이 35세, 한국에 들어온 지 2년9개월만이다.

▧ 하느님과 조선교우들을 위해

▲베르뇌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장 시므온 주교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다.

1856년 3월 서울에 도착, 10년 동안 사목활동을 하며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인쇄소 두 곳을 설립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당뇨병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목에 힘쓰고 여러 지역의 교우들을 돌보다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체포됐다. 당시 심문 과정에서 앞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고도 고통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병인박해 때 역시 체포된 ▲랑페르 드 브리뜨니에르 유스토 신부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 사제가 됐다. 수품 직후 고국을 떠나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 정의배 회장 집에 머무르며 한국말을 배웠다.

그는 정회장이 체포된 다음날인 1866년 2월 26일 베르뇌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의 고발로 체포돼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3월, 28세의 나이로 베르뇌 주교와 함께 순교한다.

한한불 사전을 비롯해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기고 10여년 동안 자료를 수집해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한 ▲다블뤼 주교는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이곳의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다.

1845년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사목하던 다블뤼 주교는 1866년 체포돼 황석두 등과 함께 서울로 압송됐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해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형리들이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하려 했지만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하기를 원한 그가 형 집행을 요구해 그대로 목숨을 다했다.

이밖에도 ▲한국에 ‘김씨’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에 교우들이 자신을 ‘김 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도리 신부 ▲충청도 공주 지방의 전교를 맡았지만 활동을 시작할 겨를도 없이 체포돼 순교한 볼리외 신부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 황무실에 부임해 그 지방을 전교했던 위앵 신부 ▲피신하려고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충청도 홍주 거더리로 다시 돌아와 체포된 오매뜨르 신부 또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힘쓴 선교사들이다.

◆ 파리외방전교회

한국 땅에 복음을 전파한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목적으로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교구 소속 신부들로 결성된 선교회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1831년 9월 9일 조선을 대목구로 설정하고 파리외방전교회의 회원인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함으로써 한국에서의 활동이 시작됐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 복음화의 밑거름이 됐다는 점과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있어서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교구를 이양하는 문제에 있어 아시아에서 제일 늦었다는 아쉬움도 남아있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