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이 땅에 빛을] (10) 초기 교회의 지도자 공소 회장들

이나영 기자
입력일 2009-04-21 수정일 2009-04-21 발행일 2009-04-26 제 264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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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교우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마을 전체를 세례 공동체로 만들었던 김성우 성인(탁희성 작).
끼니를 때우지 못해 고생하면서도 한국 최초의 고아원 '성영회' 설립 당시 책임을 맡아 고아들을 돌봤던 정의배 성인(탁희성 작).
대구 관덕정에서 52세의 나이로 순교한 이윤일 성인(탁희성 작).
공소 운영 및 전교 활동, 신자들의 신앙생활 보조 등을 위해 성직자들이 직접 임명했던 ‘공소 회장들’, 그들은 성직자 수가 턱없이 부족하고 함께 모여 기도할 공간조차 마땅치 않았던 조선시대에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이었다. 자신의 집을 공소로 제공하고 선교사들을 숨겨주었으며 주변인들을 권면하여 신앙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만 박해의 칼날이 매서웠던 시기, 그들에게 맡겨진 이 십자가는 너무도 무거운 것이었다. 사교 전파의 주축이라는 혐의로 누구보다도 먼저 체포됐으며, 더욱 가혹한 형벌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거운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졌으며, 신앙을 지켜내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 땅에 신앙 ‘겨자씨’를 키운 핵심, 공소 회장들을 찾아봤다.

▨ 서울·경기 공소회장들

▲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나 천주교는 옳지 못한 것이라 믿으며 살았던 정의배는 46세 되던 1839년에 우연히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명을 받아 천주교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글방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던 지식인이었기에 책을 구해 천주교에 대해 공부를 하고는 그 도리가 옳음을 깨달아 스스로 입교했다. 그 후 주변 사람에게 교리를 전파하고 덕행을 보였기에 서울 회장으로 임명됐다. 끼니가 없는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성영회(한국 최초의 고아원)’ 설립 책임을 맡고 고아를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1866년 72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천주교인들의 우두머리로 알려져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단 한 사람의 교우 이름도 발설하지 않은 채 군문효수형을 받고 치명했다.

▲ 서울 총회장이었던 최창현의 동생 최창흡은 1801년 그의 형 최창현이 순교한 후 가르침을 받지 못해 외교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1821년 콜레라가 유행하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부인과 함께 대세를 받고 그 후부터 부부가 함께 열심히 봉교했다. 주위 교우들이 모범적인 교우라 그를 칭할 때마다 “과거의 행실을 생각해 볼 때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오직 치명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순교에 대한 뜻을 밝혔다 한다. 53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칼을 받고 순교했다.

▲ 조선 땅에 신부를 모시려 주야를 가리지 않고 애썼던 박종원은 마침내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로부터 굳건한 신앙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서울 회장으로 임명됐다. 그 후 교우들뿐만 아니라 주변 외교인들도 그의 이름을 알 정도로 열심히 선교 활동을 펼치다 체포, 1840년 당고개에서 치명했다.

▲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 중 병사한 최방제의 형인 최형은 정식 회장은 아니었으나 베르뇌 주교로부터 세례를 줄 수 있는 허가를 받을 만큼 신임받는 교우였다. 김대건 신부를 도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에 모시기 위한 중국 여행길을 함께 했으며, 김대건 신부 순교 후에는 베르뇌 주교를 도와 천주교 서적을 출판하는 인쇄소를 세우는 일을 맡았고, 4년 동안 수천 권의 책과 소책자를 출판하다 1866년 체포,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인 최경환은 과천 지역에서 공소 회장직을 맡았는데, 그는 외교인이나 교인을 가리지 않고 보듬어 자비를 베푼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9년 체포된 후 그의 아들 최양업이 외국으로 유학했다는 것을 알게 된 포졸들은 그를 배교시키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가혹한 형벌을 가했고, 결국 35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숨을 거둔다.

▲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인천·수원 등을 다니며 책 베끼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가는 곳마다 많은 이들을 회두시킴을 인정받아 선교사들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된 민극가와 ▲ 경기도 귀산(현 광주군 동부면 구산리)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고는 열심히 교리를 가르쳐 마을 전체를 천주교 공동체로 만들었던 김성우는 체포된 후 옥에서도 배교한 이를 설득하고 다른 죄수들을 권면하는 등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신앙을 보였다.

▨ 평양·충청도·경상도 공소회장들

▲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였으나 박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거처를 옮긴 장주기는 그곳에서 회장직을 맡았다. 1855년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할 때에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주변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하며 관리를 해 나갔다. 장주기는 배론 신학교가 11년 동안이나 존속하는 데에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교우 공동체를 이끌며 선교사들을 도왔고 마치 수사와도 같은 생활을 했다 전해진다. 1866년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를 덮쳤을 때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이 신학교의 주인임을 당당히 증언, 옥에 갇혔다.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황석두는 부친의 뜻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20세에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하던 중 주막에서 우연히 만난 천주교인을 통해 교리를 습득, 시험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부친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박해를 당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천주교가 그의 가문을 파괴할 것을 염려해 갖은 방법으로 황석두를 설득하였다. 이에 황석두는 3년 동안을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키며 교리서적을 탐독,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와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다. 또한 금욕과 절제를 위해 아내와 별거하고 독신생활을 했으며, 회장으로서 교우들을 권면하였고, 신부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서적 출판에도 힘을 기울였다. 1866년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자신의 스승이요 아버지인 주교를 홀로 보낼 수 없다며 그 뒤를 따르다 결국 체포되었다. 54세의 나이로 다블뤼 주교, 장주기 등과 함께 갈매못에서 참수당했다.

▲ 홍병주·홍영주 형제는 깊은 신앙심을 가진 가족 안에서 교리를 배우며 충청도 여사울에서 성장했다. 그들의 열심한 신앙생활을 지켜본 선교사들은 형제를 충청도 내포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 교우들을 지도하게 했다. 1839년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갔을 때 마침 형제의 친척이었던 이가 형조 판서였고, 그는 어떤 고문을 가하든 그들을 배교시켜 목숨을 지키도록 만들 것을 형졸들에게 명하였는데,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형제는 함께 믿음을 지켰다. 결국 형 홍병주는 1840년 1월 31일에, 동생 홍영주는 바로 다음 날인 2월 1일에 당고개에서 치명했다.

▲ 평양 지역에 살던 유정률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짚신을 삼아 생계를 이어나갔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 아내를 때리거나 노름을 하는 등 무질서한 생활을 일삼았다. 하지만 27세 무렵 우연한 기회에 천주교를 알게 되어 세례를 받은 후에는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했고, 지나온 세월을 속죄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매질하며 극기와 인내의 생활을 하였다. 변화한 태도로 많은 이들을 권면하며 생활하던 중 체포되었는데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다”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심한 고문 속에서 함께 잡혀온 교우들이 모두 배교하자 평양 감사는 배교자들을 불러 믿음을 버리지 않는 유정률의 곤장을 치게 하였는데, 무려 300여 대의 곤장을 맞던 유정률은 그대로 옥에서 순교하고 만다.

▲ 충청도 내포 출신의 태중 교우 이윤일은 박해를 피해 경상도 문경으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공소회장으로 활동했다. 1866년 포졸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고 당당히 천주교인임을 고백, 여덟 식구를 포함한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된다. 상주로 압송된 후 배교에 대한 유혹을 모두 거절하였기에, 다시 대구로 압송되었고 1867년 대구 관덕당에서 5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충청도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많은 외교인 친구·친지들로 인해 수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해 고향을 떠나 수원으로 가 회장일을 맡았던 정화경 ▲ 충청도에서 회장직을 수행하다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길에 천주의 고통을 따르겠다며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길을 걸은 한이형 ▲ 열성적인 신앙을 인정받아 16세에 전교 회장으로 임명된 손선지와 ▲ 먼저 정착한 손선지 회장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한재권 등도 공소 회장으로 일하다 순교한 이로 기록되어 있다.

이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