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년기획 -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 버림받은 이들의 보금자리 경북 성주 '평화계곡'

전대섭 기자
입력일 1999-01-08 수정일 1999-01-08 발행일 1999-01-01 제 2133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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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 기적을 보며 살아요”
「IMF」라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지금, 지치고 힘겨움 속에서 또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 올 한해엔 「새로운 해

」가 솟아올라 따뜻하고 환한 새 빛을 누리 가득 비추길 바라는 맘 어느깨보다 간절하다. 본보는 새해를 맞아 우리 주변의 사랑과 희망을 일깨우는 두가지 기획을 마련한다. 역경을 딛고 희망을 일구는 이들과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이들의 삶을 통해 새로운 의욕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경북 성주에서 초전을 지나 김천방향으로 20여분 가다보면 왼편에 평화계곡이란 팻말이 눈에 띈다. 계곡을 따라 산길을 10여분 더 올라가면 나타나는 곳이 평화계곡 (농장)(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온통 돌로 지어진 집들이 마치 잘 꾸며진 아담한 휴양지에 온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스럽게 꾸민 정원과 산책로, 정겨움이 묻어나는 성당, 성모동산…. 평화계곡의 오늘이 있기까지 원장 최소피아 수녀와 이곳 식구들의 땀과 정성을 한눈에 짐작케 한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이 기적과 같아요. 집 하나 하나, 가족들의 건강과 웃음 모두가 퉁명스럽게 취재요청을 수락했던 최수녀는 언제 그랬느냐는듯 반갑게 맞이한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소피아 수녀의 매력(?)은 역시 투박하면서도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깊은 속정. 이곳 식구들과 오랜 친구가 되어버린 못생긴 견공(犬公) 몇마리가 내방객을 보고 꼬리를 치켜세운다.

평화계곡은 버림받은 알콜중독자와 걸인, 폐인들의 생활공동체다. 이곳 식구는 20대에서 부터 80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 47명. 9명의 수녀가 함께 살며 이들을 돌본다. 이곳 식구 대부분은 예전에 술병을 끼고 살았던 알콜중독자들이다. 이들이 알콜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끝내 유혹을 떨치지 못한 몇몇 식구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결국 술때문에 숨을 거두기도 했다.

의료봉사를 하는 의사들의 치료를 받고 공동생활을 하는 동안 한 두 사람이 알콜의 유혹을 이겨냈다. 그걸 보고 옆 사람이 또 변하면서 지금은 40여명 식구가 모두 술을 이겨냈다.

그동안 고생한 것은 말로 다 못하지 왕초수녀로 때론 또순이수녀로 불리는 최수녀는 그러나 밑바닥 삶을 살던 이들이 이곳에 와서 천사로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다.

한때는 모두가 남루한 행색으로 삶을 포기했던 이들입니다. 이젠 그들도 가슴을 열고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답니다. 이들에게서 인간은 본래 착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돼요

8년간 대구역 근처에서 무료급식소 좥요셉의 집좦을 운영해온 최수녀는 한끼 식사로는 이들의 삶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이들을 데리고 아예 이곳에 정착했다. 그때가 93년 6월. 김철식(알베르토, 대구 대덕본당)씨가 내놓은 3만여평의 임야 한켠에 돌을 주워 나르고 버려진 나무들을 꿰맞춰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집다운 집을 지어 옮긴 것이 지난 8월. 신축성당에서 버려진 폐품과 문짝, 기둥들을 모아 갈고 닦았다. 4년여의 노력 끝에 보잘 것 없던 보금자리가 행려자들의 낙원으로 탈바꿈했다.

평화계곡 식구들의 정을 느끼게 하는 일화 한토막. 새 집으로 이사를 앞두고 모두들 즐거워했지만 대소변 수발을 해야했던 몇몇 장애인을 누가 돌볼 것인지가 고민거리였어요. 그때 토마가 나서서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며 수발을 들겠다고 하더군요. 새 집도 아니고 전에 살던 집에서 말이죠. 얼마나 고맙고 가슴이 아팠는지...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이지만 이곳에 와서는 모두들 남을 생각할줄 알고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착한 마음으로 변한다는 최수녀의 눈가가 촉촉히 젖는다. 평화계곡에선 매일 기적이 일어난다. 식구들이 일용할 양식을 때만 되면 해결해주십니다. 이곳에 온 뒤로 쌀 한가마, 된장 한사발도 사먹은 적이 없어요. 모두가 하느님의 보살핌이죠

또 하나는 세상에서 죽은 목숨이던 이들이 이곳에 와서 건강을 되찾게된다는 것. 복수가 차 계란 하나도 제대로 들 수 없었던 이냐시오. 지금은 운전봉사를 하며 식구들의 발이 되어 주고 있다. 알콜중독으로 두차례의 큰 수술을 하고 폐인이나 다름없던 프란치스코. 건장한 체격만큼이나 집안 일을 도맡아 하는 든든한 일꾼이 됐다.

술에 취해 당한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돼 들어온 사도 요한. 수줍음 많은 그도 이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살림꾼이 됐다. 이들이 건강과 웃음을 되찾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사랑과 관심때문이라고 최수녀는 말한다.

평화계곡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요즘들어 이곳을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기업체 근로자들도 봉사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평화계곡의 사랑과 온정을 직접 체험하려는 피정자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곳에서 피정을 원하는 이는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최수녀는 평화계곡이 누구에게나 하느님을 체험하고 쉬어갈 수 있는 열린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처음엔 화전이나 일구며 살려고 했죠. 알콜중독자와 갈 곳 없는 이들이 모여 건강하게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새해를 맞는 평화계곡 가족들의 마음은 함께 하는 이들이 있기에 외롭지 않고, 더불어 살므로써 느낄 수 있는 행복과 평화가 가득하다. (0544)963-0022

전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