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서양자 수녀의 중국 가톨릭 교회사] (42·끝) 경자(庚子)교난 8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1999-11-28 수정일 1999-11-28 발행일 1999-11-28 제 217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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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보호 애쓰던 신부 토비들에 살해돼
1940년 몽고대목구 설정
1883년 3개 교구 탄생
내몽고 지역 교난

내몽고 지역 교난 내몽고지역은 중국의 병강지역으로 한인(漢人)과 몽고인이 살고 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열하(熱河) 찰합이(察哈爾) 수원(綏遠) 녕하(寧夏) 4성에 속한다. 이 광대한 지역은 해발 700에서 2000미터의 높은 산지로 되어있으며 위치는 만리장성 이남으로 3면이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후도 특이하여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매우 더우며 겨울과 여름 기온이 섭씨 80도나 차이가 난다. 봄에는 모래가 섞인 황풍(黃風)이 불며 강우량도 적어 전체가 황원(荒原)이며 광야(曠野)이다. 주민의 대부분이 몽고인이며 남쪽에 한족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 내몽고 서만자 지역은 라자리스트회가 선교하다가 1846년부터는 테오피레 페르비스트 신부가 창설한 성모성심회가 맡게 되었다. 내몽고지역 선교의 중심 지점은 서만자(西灣子)였다. 몽고인들은 유목민들로 라마교를 믿고 있었으며 생활이 변화무쌍하여 선교를 하기가 상당히 힘이 들었다. 넓은 지역에서 마음대로 생활한 사람들이 되어 사회관념이나 국가관념이 없었다. 1844년 후실 신부와 진가베트 신부는 라마승의 옷을 입고 천신만고 끝에 18개월만에 서장의 라싸에 도착했으나 마카오로 구축되었다. 내몽고지역에 인구가 희소하여 19세기 중엽 전체 인구가 25만 정도 밖에 않았다.

어쩌다 유목민들의 천막이 하나씩 눈에 띠일 정도이고 몇 개의 라마사원이 있었다. 교통이 매우 불편해 중국의 치안이 미치지 못하여 자체 방위를 해야됐으며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학교 병원이란 들어보지도 못한 말이었다. 모피가 수출의 주종을 이루는데 모피가 포두(包頭)로 집중되었다. 중국 북부지역에 크게 흉년이 들었을 때 유민들이 얇은 옷을 입고 내몽고 지역에 들어왔다.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당장 거처할 곳도 없었고 초원에 나무가 없어 집을 짓는 것도 문제였다. 식수를 구한다는 것도 어려운 문제 중에 하나였으며 땅 10자를 파야 식수가 나왔다. 성당에서 농기구 곡식 종자를 공급해주고 토지 개간하 일을 전적으로 도와 주었다. 선교사들은 하투(河套) 등지를 개간하였는데 이 곳은 일년 내내 비가 오지 않을 때도 있다. 선교사들은 수로를 파고 황하의 물을 끌어들였는데 수로 길이가 378㎞이고 넓이가 10m나 되었다 한다. 이 수로를 착안한 사람은 신부였으며 수로를 팔 때 음식 도구 비용을 성당에서 공급하였다. 이곳의 땅은 사토, 교토(膠土), 흑토(黑土) 3종류인데 비가 오지 않으므로 수로가 주민의 생명선이었다. 개간한 땅에 보리, 밀, 콩, 채소를 심었으며 농사가 잘되자 주민이 3000여명이나 되었다. 1890년에는 주민이 2만 여명으로 늘어 났으며 30개의 교우촌이 생기게 되었다. 신부들이 화북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하였으며 인민에게 복리를 주었다.

이곳은 지방관도 없고 치안이 미치지 못하여 무법지대였으므로 신부가 치안까지 맡아 주민들을 보호해 주어야했다. 신부가 마을 자체 방위를 위해 지휘하고 마을을 지키다가 토비들에게 많이 살해되었다. 내몽고 지역의 토묵특(土默特)도 신부들이 개간을 하였는데 이곳은 북쪽은 대청산 (大淸山)이고 남쪽은 황하인데 삼각형의 넓은 땅이 있었는데 이곳을 중국인들은 좬투모트좭라고 불렀다. 이 땅이 약 400만평 정도되었는데 이 습지 땅을 둑을 쌓아 물의 범람을 막고 개간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농사를 짓고 살게 되었는데 신부들이 남녀중고등학교와 의원을 세웠다. 한영(韓塋)성당에 속한 땅이 30경(頃)이었으며 임삼밀(任三密)성당은 20경이고 쌍용진(雙龍鎭)성당은 10경 토묵 특성당은 10경의 땅이 있었다. 중국에서 천주교회가 땅을 상당히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교우들의 대부분이 빈곤층으로 교회에 들어오면 식생활까지 해결해주어야 했으므로 좥쌀 교우좦 좥흘(吃)교우좦가 있었다는 것이다. 성당 유지비, 전교비, 성당에서 고용한 사람들의 봉급, 자선사업비를 모두 소작료에서 나오는 비용으로 썼던 것이다. 당시 여행가가 말하기를 좬서북 황야에 만약 푸른 농촌을 본다면 거기에 성당과 십자가가 있었다좭고 하였다. 1840년 몽고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1883년에는 몽고에 3개의 교구가 설정되었다.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