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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순교자를 증언한다] (12) 교회와 사제 지키다 순교한 이규식 신학생

박영호 기자
입력일 1999-11-28 수정일 1999-11-28 발행일 1999-11-28 제 217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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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난 터지면 제일 먼저 치명” 다짐
‘과묵·충직한 성품’ 모든 이 귀감
1949년 12월 6일 오후, 대신리본당 주임이자 평양교구 임시 교구장직을 맡고 있던 박용옥 신부를 끌고 가기 위해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이 몰려오자 이규식 베드로 신학생은 위기를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성당 종을 치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명의 신자들이 본당으로 나와 정치보위부원들로부터 신부를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홍용호 주교가 납치된 후 북한 공산 당국의 박해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각 본당에서는 교회와 신부들을 지키기위해 대책을 마련하고 갖가지로 노력했고 만약 평양 시내 본당에서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성당의 종을 울려서 신자들에게 위기를 알리기로 했다. 그런 가운데 홍주교에 이어 부주교 김필현 신부, 주교비서 겸 교구청 경리 담당 최항준신부, 주교좌 성당 건축위원회 상임이사, 강계본당 석원섭 신부와 최삼준 본당 회장 등이 잇따라 납치됐다. 그러자 대신리 본당 신자들은 임시 교구장직을 맡은 박용옥 신부의 차례임을 직감하고 본당 신부를 지킬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규식 신학생은 미리 약속해둔 대로 성당 종을 치기 시작하자 화가 잔뜩 난 보위부원 하나가 종 줄을 끊었다. 하지만 이규식은 종각 위로 올라가 계속 종을 쳐댔다. 보위부원들은 신자들이 계속 신부의 연행을 막자 본부에 연락해 50여명의 증원 병력이 도착했고 필사적으로 종을 치고 내려온 이규식을 붙잡아 심하게 구타했다. 결국 신자들은 보위부원들과의 난투극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쫓겨났고 박신부는 신자들이 다치는 것을 걱정해 스스로 밖으로 나와 보위부원들 앞에 나섰다. 이윽고 성당 문앞에 검은 세단 한 대가 도착하고 보위부원들은 박신부를 차에 태워 연행했다. 보위부원들은 이어서 구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이규식 신학생을 개 끌 듯 발을 잡고 질질 끌며 잡아가고 말았다.

평생을 사제로 살고자 기도하며 수도자처럼 생활해왔던 이규식 신학생은 일찍부터 『언제가 될지 몰라도 군난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나아가 치명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 다짐처럼 그는 순교의 길에 두려움 없이 나섰던 것이다. 일찍부터 이규식 신학생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주위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과묵하고 충직한 성품에 항상 기도하며 순명과 극기의 수도자적 생활로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됐던 그는 1923년 10월 9일 평안남도 원탄면 상리에서 2남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고향 상리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가족들이 모두 동평양으로 이주함에 따라 대신리 본당에서 운영하던 동평학교로 전학해 보통학교를 마쳤다. 이를 계기로 모든 가족이 천주교에 입교했다.

당시 대신리본당 주임이던 김필현 신부는 이규식을 유난히 아껴 그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자 동평학교 급사로 채용하고 눈여겨 보았다. 두드러진 성실성과 신앙심을 높이 산 김신부는 그를 일본 나가사끼에 있는 가톨릭계 학교에 보냈고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평양으로 돌아와 2년간 성모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자신의 성소를 깨달은 이규식은 광복 직전 성모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차디찬 본당 제의방에서 라틴어 공부와 신학교를 가기 위한 준비 및 공부를 2년간 했다. 1947년 9월 이규식은 덕원 대신학교에 입학했고 사제 생활로의 첫 걸음을 시작했다. 묵묵하게 사제가 되기 위한 수업에 열중하고 있던 그는 1949년 신학교 폐쇄 후 평양으로 돌아왔다. 5월 7일 북한 보안서원들이 원산교구장인 신 주교를 비롯해 신부 4명을 체포, 강제 연행하는 것을 시작으로 원산교구의 교회와 모든 재산이 몰수됐고 신학교도 문을 닫았던 것이다. 서포 성모 수녀원에서 기거하던 그는 수녀원까지 공산당에 몰수당하고 수녀들이 강제 해산되면서 다시 대신리본당으로 돌아와 본당에서 숙직하면서 주일학교 지도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가 1949년 겨울, 마침내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이 들이닥쳤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교회와 신부를 지키려다가 결국 순교의 길에 나선 것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