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서양자 수녀의 중국 가톨릭 교회사] (36) 경자(庚子)교난 3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입력일 1999-08-22 수정일 1999-08-22 발행일 1999-08-22 제 2165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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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지붕성당에 불질러 신자 몰살
피신못한 여교우들은 우물에 투신
死人村이 된 朱家河

의화단은 주가하의 교우들을 섬멸하려고 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화가나서 경주(景州)로 가서 좥천주교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데 내부에서 양인이 지휘하고 있으며 천진의 서양군인들과 내응을 하고 있다좦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7월 17일 정오 관군과 의화단 1만여명이 몰려오자 두 신부는 작전을 더이상 지휘하지 않고 순교를 준비시켰다.

교우들은 싸움을 시작한지 3일만에 무기가 다 떨어졌다고 한다. 1천여명의 장정이 계속 전사하고 산 사람은 얼마 안되었다. 성당에 들어가지 못한 부녀들은 육영당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다. 젊은 부녀들이 군인과 의화단 손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우물속으로 몸을 던졌는데 워낙 많은 사람이 몸을 던졌으므로 죽지 않고 1, 2일 동안 신음소리가 났었다고 한다.

7월 20일 주가하는 완전히 함락되었다. 의화단은 오합지졸이었으나 군인들은 훈련이 되어있었고 전쟁 경험이 있었다. 군인들과 의화단이 3면에서 들어왔다. 방책(防柵)을 앞에 두고 얼굴은 검게 칠했으며 흰옷을 입고 허리에 넓은 띠를 두르고 머리에 흰 건을 쓰고 엎드려 있어 의화단은 처음에 두려워 가까이 접근을 못했다. 큰소리로 욕을 하다가 의화단 단원 하나가 방책을 부수고 들어와 엎드려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이들은 전부 동정녀들이었는데 의화단이 살해한 것이다.

부녀들과 노약자들이 성당에 빽빽히 앉아있었으며 강당에도 부녀들, 노인과 어린이들이 1천여명 있었다. 의화단이 성당에 총을 쏘고 대도살을 시작하자 임신부는 교우들을 향해 좬교우 여러분 잠시 동안의 고통을 참으면 우리는 모두 곧 천당으로 승천합니다좭고 말하고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리고 탕신부는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제대 앞으로 기어갔다. 두 신부는 급소를 맞지 않았기 때문에 한참 피를 흘리다가 순교하였다. 성당 지붕은 갈대로 덮혔었는데 의화단은 인화물을 사방에 끼얹고 방화하여 지붕이 그대로 주저앉자 성당에 있던 사람들이 타죽었으며 창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밖에서 그대로 죽였다. 그중에 49명은 체포하여 로가장(路家莊)에서 죽였다 한다.

군인들과 의화단은 총탄을 절약하기 위해 칼로 찔러죽였다하며 시체가 층층이 쌓여 시신이 「종횡만지」(縱橫滿地)가 되고 피가 개울처럼 흘러내렸다 한다. 주가하는 완전히 초토화 되었으며 사인촌(死人村)이 되었다. 의화단과 군인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약탈을 하려고 돈과 금은 보화를 찾아 헤매었다고 하며 젊고 얼굴이 예쁜 부녀들은 찾아 죽이지 않고 팔았다고 한다.

동정녀 이마리아는 37세인데 교난시 주가하에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군인이 이마리아를 경주 시내에 끌고가 팔려고 가마에 태웠다. 이마리아는 가마속에서 좬천주님 제 영혼을 빨리 거두어주소서좭하고 기도했는데 경주시에 도착하여 군인이 가마문을 열었을 때 이마리아는 눈을 감고 기절해 있어 팔지못했다고 한다. 주가하의 위유(魏劉)씨는 세례명이 마르타인데 나이는 28세였으며 자색이 고왔다. 의화단이 마르타를 팔아서 돈을 벌 속셈으로 마차에 태우고 경주 시내로 달렸다. 마르타는 눈치를 채고 달리는 마차에서 굴러 떨어져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의화단 단원은 마차를 세우고 마르타를 태웠다. 마르타는 또 굴러떨어졌다. 이렇게 하기를 세번 하자 의화단 단원은 화가 나서 칼로 마르타의 목을 베어 죽였다. 주가하에는 3천여명 교우들의 시신이 약 3개월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도둑들이 시신의 옷을 벗겨다 팔았다고 하며 야생개들과 짐승들이 와서 시신을 먹었다고 한다.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 정부로부터 성당 건립비와 장례비로 1만냥을 받게되었다. 1901년 헌현 예수회 회장 만바오로 신부가 주가하에 파견되어 유해를 수습하게 되었는데 우물 안의 시신은 악취가 많이 풍겨 인부가 도망을 가기도 하였다. 이 유해를 수습하는데 약 1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성당 안의 유해도 불에 타고 부패하여 누구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고 하며 우물의 시신은 끌어내지 못하고 그냥 막아버렸다고 한다. 로가장으로 가서 주일신(朱日新) 등 49인의 시신을 찾아 합장하고 1902년 3월 15일 3천여명 순교자들의 합동미사를 봉헌하였다. 주가하에서 순교한 교우들은 거의 무명 순교자이다.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