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서양자 수녀의 중국 가톨릭 교회사] (31) 양자강 유역의 교난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입력일 1999-07-18 수정일 1999-07-18 발행일 1999-07-18 제 2160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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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양자강 유역 장학하자 지역경제 타격
자본주의 반대 성격의 ‘반양교운동’ 폭발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영국의 침략지역은 동남 연해와 양자강유역이었다. 19세기 70년대부터 영국은 또한 식민지인 인도 버어마를 기지로 하여 침략의 마수를 티벳 중국의 운남성 등지로 뻗쳐 중국 서남 변경에 위기를 조성하였다.

영국은 19세기 40년대부터 인도로부터 티벳에 들어올 음모를 꾸몄다. 영국이 양자강 유역을 장악하여 양자강 중하류에 침략이 커지고 농민, 도시 빈민은 물론 국내 상업 및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 지주에게도 대타격을 주었다. 외국상품 수송을 위해 기선이 취항하게 된 것은 구식 운수 교통업자 및 그 고용인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영국이 양자강 유역을 장악한 것은 실상 청조 정권의 목덜미를 누를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한 셈이었다 양자강 하류일대에 반양교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강소, 안휘, 강서, 호북, 호남 수개의 성에서 폭동이 일어나 교회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양자강 유역의 서양선교사가 육영당(고아원)의 어린이를 살해하고 안구를 빼낸다는 유언비어가 도화선이 되었다. 양자강 유역에서 짐부리는 사람, 사공, 수공업자, 공인(工人) 등과 빈민들이 투쟁에 참여하였다.

1888년 양자강 하류에서 반양교 분위기가 생성되었으며 1891년경에 호남의 반양교 지도자 주한(周漢)이 대량으로 선전품을 인쇄하여 전국 각지로 보냈다. 이 선전품중에는 책, 벽보, 전단, 가요, 그림 등이 있었다. 책은 제심문장(齊心文章), 귀규해사(鬼叫該死), 극수문장(棘手文章)으로 이러한 출판물들이 반양교운동에 이용되었다. 당시 벽보에 쓰여진 글중에 좬양인 국가들은 남녀를 유인하여 남녀를 한자리에 모이여 풍속을 상하게 하고 최근 부녀를 유인하여 창녀가 되게하고 어린이를 유괴하여 안구를 빼내고 심장을 빼낸다. 그러나 관부는 이런 교회를 비호하고 있다좭고 하였다.

양자강 하류지역에서 반양교운동이 일어나 중류지방으로 올라왔다. 양자강 중하류의 반양교 투쟁이 고조되자 운남, 귀주, 복건, 직예 등지에서 봉건적인 압박에 반항하는 폭동이 계속 일어났다. 반양교운동의 핵심 세력은 민간결사였으며 파산한 농민, 실직자가 된 수공업자겴??무산계급이었다. 민중들은 영국 교회와 개신교 교회 천주교 성당을 파괴하고 방화하고 교민들의 주택을 습격하였다. 양자강 유역의 반기독교 운동은 종래의 구교운동의 영역을 넘어 반자본주의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강소성 단양(丹陽)에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와 성당과 학당, 고아원을 세우고 자선사업을 하였다. 이곳에도 서양선교사가 어린이를 살해하고 안구를 뺀다는 소문이 들어와 1891년 4월 25일 성당부근 주민 10여명이 와서 조사를 하겠다고 하는 것을 교우들이 거절하였다. 군중들이 성당 뒷문으로 조수와 같이 밀고 들어와 성당과 주위 건물에 방화하였다.

열하(熱河)의 조양(朝陽)에서 1891년 금단도(金丹道)가 기의(起義)를 일으켰는데 수만명이 「구살천주교(仇殺天主敎)」 「구살몽고왕공(仇殺蒙古王公)」 「구살탐관(仇殺貪官)」 구호를 내걸고 성당에 방화하고 탐관오리를 살해하였다.

명말 청조에 천주교가 사천성에 들어가 100여년 후 가경제 때는 교세가 형성되었다. 가경제는 1805년, 1811년 전국적으로 금교령을 내렸으나 사천성에 천주교를 말살시키지는 못하였다. 성도에서 1895년 5월 단오에 주민들이 모여 전통적인 풍속에 의해 제사를 지내고 노는데 갑자기 한사람이 사성사(四聖祠)성당의 신부가 어린이를 죽이고 안구를 뺀다고 하였다. 군중들이 분개하여 사성사성당으로 가서 성당을 파괴하고 평안교 성당, 북문밖에 성당을 파괴하였다. 참가자는 거의 빈민이었다. 선교사들은 다행히 모두 다른 곳으로 피하여 모두 무사하였다. 천진조약과 북경조약 후 교세는 더 확장되었으며 사천성에 천동(川東), 천서(川西), 천변장구(川邊藏區) 등 4개의 교구를 설립하였다. 그후 영국, 미국, 개신교 교회도 들어왔으며 영국은 복음당(福音堂)을 건립하였다.

복건성 고전(古田)에 비밀 종교 조직인 채회(菜會)가 있었다. 천주교가 1860년 고전에 처음 들어가 지방관과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으나 1871년 이후에는 반양교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원인은 고전 천주교가 지방관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천주교가 신속히 발전하여 1895년에는 교우가 3000여명이나 되고 촌마다 성당이 있었다. 1895년 채회가 민중을 선동하여 성당을 파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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