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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로드를 가다] 24. 순교를 각오하라, 로마

입력일 2008-12-14 수정일 200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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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대성당 내 사도 바오로의 무덤 앞에서
절망 대신 희망을

죽음 대신 생명을

먼저 나의 하느님께 그리고 사도 바오로께 감사를 드린다.

위험을 무릅쓰고 강행한 이탈리아 남부 기차 순례 여행은 안전하게 끝났다. 사도 바오로의 특별한 보살핌이라고 나는 지금 이 순간, 믿는다. 이탈리아 남부 시라쿠사를 출발, 포추올리를 거쳐 순례 마지막 종착지, 로마로 입성했다. 사도께서 로마로 압송돼 교우들의 환대를 받으며 걸었다는 아피아 국도(Via Appia)를 찬찬히 걸으며 나는 그 도로 바닥 길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로마 교우들의 환하고 따뜻한 얼굴과 손길이 느껴진다.

사도행전 28장 14~15절에 바오로 일행은 로마에 도착해 로마 교우들의 환대를 받고 감격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용기를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탈리아 로마 떼르미니 기차역에 도착하던 날, 나는 놀랐다. 성 바오로 수도회 동료 수사님과 가족 수도회 수녀님이 배웅을 나오셨기 때문이다.

로마에서의 순례가 무사히 끝날 수 있음은 동료 수사님과 신부님, 수녀님들의 전폭적 지지와 기도 덕분이었음을 나는 이 자리에서 고백한다.

바오로 사도와 직접 관련 있다는 장소들을 동료 수사님들의 도움을 받으며 직접 보고 만졌다. 이 모든 곳에서 나는 사도 바오로의 피와 땀의 흔적을 살피고자 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외적으로 볼 때, 절망적 상태였고 감옥과 쇠사슬이라는 육체적 제한도 뒤따르는 상태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삶을 미리 포기하거나 절망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희망’을 선포했다. 복음을 알렸다. 기쁜 소식을 전했다.

수도생활과 동시에 전문적 사도직을 수행해야 하는 우리 ‘바오로인’들은 많은 장애물을 만난다. 이 장애물들은 때로는 너무나 크고 힘이 든다. 힘에 부쳐 절망적 상황에 봉착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실제로 이 문제로 수도회를 떠난 회원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바오로 로드를 걸으며, 나는 이 장애물이 수도회의 고유한 삶의 여정에 따른 ‘고난’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는 그 많은 위기와 고난을 뛰어넘은 ‘승리의 사도’였다. 우리의 사부, 모델이신 사도 바오로가 극복한 것처럼 우리도 나아가야 한다.

성 바오로 대성당 내 바오로의 무덤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나의 심장은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 분명한 사실이다.

2000년 전, 바오로 사도는 육체적으로 죽고 무덤에 묻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도 바오로는 나의 가슴에 살아계신다. 그 분은 내안에 영적으로 숨쉬고 계신다. 이제 나의 삶의 모델이자 원천이신 그분의 열정과 삶을 본받고자 한다.

오직 한 가지만 바라보며 살고자 한다.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이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며 내달리고 있습니다.” (필리 3, 14)

- 사도 바오로의 피와 땀의 흔적을 몸소 체험하며 김동주 도마 수사(성 바오로수도회)

◎오혜민 기자의 동행 tip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한 바오로/

네로 박해 때 순교 추측

바오로는 로마에서 전셋집을 구해 살았는데, 비록 경비병의 감시를 받기는 했지만 찾아오는 시민들에게 자유로이 전도했다고 한다.

사도행전 마지막을 보면,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년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라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바오로와 베드로는 언제 순교했을까. 학자들은 그가 ‘네로 박해’ 때 순교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64년 네로가 로마 빈민가를 불 지르자 시민 여론이 사나워지고 황제는 다급한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64~68년 동안 모질게 박해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