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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17) 기를란다요의 ‘성모님의 탄생’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8-09-14 수정일 200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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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 어머니여, 온 세상이 기뻐 춤춥니다”

15세기 피렌체 최고 거장… 미켈란젤로의 스승

성모 탄생화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손꼽혀

성모님의 탄생에 관해 성경에서는 언급이 없으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성모님의 아버지 요아킴과 어머니 안나는 주위의 존경을 받으며 행복한 생활을 해왔으나 한 가지 근심거리는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요아킴이 성전에 제물을 바치러 갔는데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사제로부터 제물을 거부당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일로 여겨졌다. 슬픔에 젖은 요아킴은 광야에 가서 은둔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안나 역시 온 정성을 다해 기도했으며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교회에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져 천사가 요아킴에게 나타나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며 성전의 문으로 가라고 예언했다. 안나에게도 천사가 나타나 똑같은 예언을 했다. 서로 다른 곳에 있던 두 사람은 황금 문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성전의 성문으로 가서 만나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눴다.

성모님의 탄생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부터인데 그 중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9~ 1494)의 것이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힌다. 기를란다요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 워낙에 출중한 천재 제자에 가려져 이름이 덜 알려졌으나 15세기 피렌체 최고의 거장으로서 특히 프레스코 벽화에서는 따를 자가 없었던 거장이었다.

그림을 보면 평범한 가정집이라고 하기에는 호화로운 실내에 여인들이 모여 있다. 방안에는 정교한 목상감으로 장식된 가구가 보이고, 꼬마 푸티들이 춤을 추는 부조 장식은 방의 격조를 더해주고 있다. 침대에 누워있는 여인이 산모 성 안나이고 그 아래에는 하녀가 갓 태어난 아기 성모님을 안고 있다. 발레리나가 춤을 추듯 우아한 자태로 하녀가 아기를 씻길 대야에 물을 따르고 있는데 일상에서 쓰는 세수 대야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멋들어진 고전풍이다.

이들 앞에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며 방문한 여인들이 서 있는데 가장 앞줄에 선 젊은 아가씨는 얼핏 보아도 당대 최고의 패션을 자랑할 만한 멋진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녀는 바로 작품을 주문한 조반니 토르나 부오니의 딸 루도비카로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딸에게 주는 최고의 결혼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주문자 조반니는 예술 후원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외삼촌으로 피렌체의 최고 명문가 사람이었다. 뒤에 있는 여인들은 가문의 주요 여인들일 것이다.

화가는 주문자의 가족을 성화 속에 그려 넣음으로써 성모님의 탄생에 후원자 가족이 참여하는 것처럼 했다. 감히 성화 속에 세속인을 그려 넣다니 말이 안 될 것 같지만 사실 이는 막대한 돈을 지불하여 교회의 곳곳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대가로 자신들의 모습을 후대에 길이 남도록 초상화로 그리게 한 전형적인 르네상스 문화의 산물이며, 이 모든 것은 주문자의 철저한 요구와 계약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화면 왼편 위쪽에 한 쌍의 노인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독자들이 짐작하신대로 성모님의 부모님인 성 요아킴과 성 안나가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성전 문에서 만나 기쁨을 나누는 장면이다. 화가들은 성모님의 탄생 장면에 전승에 의해 전해지던 이들 부부의 성스러운 만남을 함께 그리기를 좋아했다.

화가 기를란다요는 서로 다른 시기 이뤄진 두 사건을 한 공간에 그려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문제는 배경이 당시 르네상스 시대의 호화판 저택이라는 너무도 사실적인 공간이라는 점이다.

작가가 고안한 해결책은 공간을 나누는 것. 그러고 보니 화면은 아름다운 기둥에 의해 나뉘어 있다. 오른 쪽은 성모님의 탄생이 이루어지고 있는 방안이고, 왼편은 현관에서 계단을 통해 실내로 이어지는 공간이다. 화가는 예루살렘 성전문을 대신해 이 현관 문에서 천사의 예언을 들은 성모님의 부모님을 만나게 한 것이다.

기를란다요의 이 작품은 배경이나 인물들이 너무도 아름다워 세속적인 냄새가 폴폴 나는 성화이지만 신학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화가는 이곳에 이 작품을 비롯하여 성모님의 일화와 세례자 요한의 일화를 14점의 대형 벽화에 그렸는데 이들 그림의 높이는 건물의 3~4층 높이에 이르는 방대한 것으로서 피렌체가 자랑하는 최고의 걸작에 속한다.

이 벽화가 있는 곳은 피렌체 중앙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고딕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제대 뒤쪽 성가대석 벽이다. 필자가 피렌체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중앙역을 나오자마자 거대한 교회가 보이기에 “역시 피렌체답게 대성당도 거대하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대성당은 따로 있었고, 이 같은 규모의 성당이 여러 군데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규모에서나 질에서나 예술의 도시 피렌체의 진면목을 생각케 하는 성당이다.

고종희(마리아·한양여대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교수)

Tip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20여 년간 화가로 활동하며 무수한 프레스코화를 남긴 작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어떻게 화가 수업을 받고 화가로서 출발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이번 호에 소개된 ‘성모 마리아의 탄생’은 세례자 요한의 일생과 함께 기를란다요가 마지막이자 최대 규모로 그린 연작 프레스코화로 더욱 유명하다. 기를란다요는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 대성당 부속 토르나니부오니 성당 벽에 그린 이 연작의 완성은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때문에 작품의 끝마무리는 그의 제자들이 담당했다.

기를란다요의 작품은 미술사 외에도 역사풍속 등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가 누구보다 세밀하고 사실적인 표현에 뛰어난 덕분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다른 프레스코화보다 더욱 일화적인 내용, 귀족 저택의 실내장식과 당시 의상 등의 모습을 자세히 만나볼 수 있는데 흡사 스냅사진을 보는 것과 같은 분위기다. 이렇게 철저한 사실기법으로 “기를란다요는 상점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얼핏 보고서도 아주 닮게 그릴 수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고.

교황 식스토 4세 초청으로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그리기 위해 로마에 머무는 동안에도 기를란다요는 고대 유적들을 드로잉하며 스스로 훈련을 더해 자와 컴퍼스 등의 도구 없이 어떤 대상이든 정확한 비례로 그려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기를란다요란 이름은 중세 유명 화가의 일생을 언급할 때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가 그린 피렌체 온니상티 성당의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큰 감동을 주어 최후의 만찬을 그리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천재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13세 때 기를란디요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1년여간 수학한 인연이 있다.

그림설명

기를란다요, '성모 마리아의 탄생', 1486-1490,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