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60】신학하기는 물들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입력일 2007-05-13 수정일 2007-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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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얻기 위해

흔히 신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향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한다.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신학을 할 때 자신부터 시작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추벌레가 배추를 먹고 배추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예수의 사랑에 닿아 그분의 빛깔로 물드는 것, 이것이 우리가 신학을 할 때 우선적으로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신학은 물들이기가 아니라, 물들기라고 말한다.

예수께 물들어 사는 신학은 어떻게 나타날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영에 물들어 순명하신 것처럼, 그분의 영에 순명하며 산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생명의 다스림에 물들고 예수님의 사랑에 물들어 살리는 영으로 사는 것, 이것이 신학의 원형이다.

이를테면 나에게서 신학은 순명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순명 그 밖에 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순명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물’이 덜 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같은 사실을 이번 동아시아 신학 여행을 통하여 매우 아프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미래사목연구소는 한국 교회가 동아시아 복음화의 지평을 검토하고 복음화 방법을 찾는 여정에 동참하기 위하여 3년 기획으로 “동아시아 복음화, 어떻게 할 것인가”를 탐색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를 위하여 지난 4월에 대만과 홍콩, 마카오를 방문하였다.

현지 선교사들의 도움에 힘입어서 지역 교회의 현실과 관심을 효율적으로 포착하면서 그곳 지도자들과 만나는 가운데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정리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교회가 무엇에 순명하는가 하는 문제를 역사에 근거하여 보다 더 철저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례로, 마카오는 440여 년간 포르투갈에 지배를 받다가 1999년 12월에 차이나에 반환되었다. 이곳은 2050년까지 기존의 경제와 사회 체제를 유지하도록 허용된 자치구로 존속한다. 포르투갈 통치시기에 지배자들은 가톨릭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여러 특권을 부여하였다.

사제들에게 보수를 지급하였고, 수도회나 교구에 땅을 기증하였다. 지금도 홍콩-마카오 여객선을 이용할 때, 그 소유주는 마카오 정부에 등록된 수도자의 경우 일반인의 6분의 1이 안되는 요금을 내도록 배려한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한편으로 교회에 재정적 뒷받침이 되고자 하는 선의로 볼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는 지극히 감사할 일이다. 이런 방식의 후의에 힘입어 1600년경에는 주민의 95%가 신자였다.

그런데 현재는 신자가 주민의 7.4% 정도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지배자들이 95%에 달하는 차이나인에게 그동안 해온 일과 무관하지 않다.

포르투갈 식민 지배자들은 일요일이면 포르투갈어 미사에 참여하면서 주중에는 자신들이 하는 것과 동일한 일을 수행하는 차이나인들에게 자신들이 받는 것의 2분의 1, 혹은 3분의 1의 보수를 지급하였다. 말하자면, 차이나인들에게 착취한 것을 교회에 기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하는 사이에 민중은 포르투갈 가톨릭인들의 교회를 차별하는 이들의 교회, 차이나 민중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의 교회로 알게 만드는 사회 정치적 현실을 종교 배경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체제 속에서 교회가 민중의 신뢰를 받을 수 있겠는가? 교회가 정의의 하느님의 영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것은 저 불의한 체제가 주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질문할 능력과 직결되어 있다.

생명의 하느님의 살리는 영 안에서 새롭게 생기를 되얻을 수 있는 길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는 자유의 영으로 저 차별받은 민중의 아픔과 신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조하여 바르게 품어안는 따뜻한 마음을 회복하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교회가 순명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오로지 정의와 생명의 하느님, 사랑과 섬김의 그리스도의 부름일 뿐이다. 그리하여 2000년 전통으로 이어져 온 돌봄과 섬김의 교회 전통에 순명하고, 정의와 생명과 사랑을 갈구하는 민중의 희망에 순명해야 할 것이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느님이 부르시는 영원의 도시에 대한 자신의 갈망에 바르게 응답할 자유를 얻게 될 것인데, 그때 비로소 우리 교회는 저 자유와 순명의 흐름을 타고 민중의 품에서 살리는 공동체로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이다, 아름답게.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