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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하느님의 생명의 다스림을 민중과 함께 세울 때

입력일 2007-04-29 수정일 200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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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동참하는 교회

생명의 다스림을 민중에게 전하면서 그 다스림의 가치를 실천하는 신실함(誠)에서 동아시아 복음화의 길을 보았다. 이같은 종교적 신실이 복음화 결실과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증거한 선구자 가운데 한 사목자로 ‘마음의 사목자’ 지학순 주교를,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은 오경환 신부를 들 수 있다.

오신부는 교회가 민족의 운명에 동참할 때 민중의 교회로 수락되고 번창한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 바 있다.(‘체코교회와 교세변동의 요인 고찰’, 가톨릭사회과학연구 2집, 1983)

우리의 역사로 눈을 돌려서 구체적으로 보자면, 한국 교회는 1784년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이래 억눌린 상태에서도 인내롭게 신앙을 지켜 왔다. 이들의 희생 위에서 마침내 19세기 말에 종교의 자유를 얻기에 이른다.

그러나 1905년을 전후하여 일본 식민지배가 노골화되기 시작할 무렵, 우리 교회는 민족의 고난을 자신의 신앙 실천과 통합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서 개신교는 일정하게 민족의 고난을 하느님의 정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계하여 민중 사이에서 민족의 희망을 지켜 갈 영성적 에너지를 발생시켰다.

이 시기의 교세 변화를 비교해 보면 가톨릭과 개신교가 당대 한국 민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예컨대, 가톨릭의 경우 1885년에 신자수가 13,623명이었고, 1905년에는 64,070명이었다. 이 시기에는 선교사들과 신도들이 개화 정신의 흡수와 소통을 통하여 민족의 자각에 기여하면서 매년 7% 이상의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에 의해 본격적으로 지배당하기 시작한 1905년부터 일본에 병합되기 전인 1909년까지 연평균 신자 증가율은 2.24%로 떨어진다. 이후 1910년부터 해방을 맞이하기 직전인 1944년까지 가톨릭 교회의 성장률은 평균 2.73%를 나타낸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 역사 20여 년 만인 1907년부터 벌써 개신교의 교세에 뒤지기 시작하였다. 일본 총독부의 발표를 기준으로 1941년말 가톨릭 신자수는 108,079명이었고, 개신교 신자수는 350,222명이었다. 말하자면, 민족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개신교가 교세 면에서 큰 차이로 앞서게 된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 가톨릭 교회는 한국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1950년대에 다른 나라 신앙 공동체 등이 한국민을 돕는 데 힘입어서 높은 성장률을 보인다. 그러나 1964년경부터 단순 원조가 끝나자 이러한 증가세가 급격히 떨어진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서, 1971년에는 전년 대비 0.29%의 신자 증가율을 나타냈다.

이런 정황에서 1974년부터 한국 교회가 시민사회의 자유권과 생명권을 비롯해서 사회정의를 위하여 본격적으로 헌신하는 계기를 열어가기 시작하였다.

원주교구 교구장지학순 주교가 노동과 인권을 사목에 통합해 가는 과정에서 1974년 7월에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구속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보았다. 그러자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전국 규모로 연대하기 시작하여, 9월에는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이래 교회는 최소 3.91%의 성장률을 보이면서 점진적인 신자 증가를 체험하기 시작한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1979년 10월에 살해당한 이후 등장한 신군부가 광주 사건을 일으킨 1980년에는 광주대교구가 중심이 되어서 시민들의 편에서 그들이 겪는 고통에 동참하며 정의를 세우는 데 헌신하게 된다. 1980년대 내내 한국 교회는 매년 최저 6.74%, 최고 9.6%에 달하는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간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성당은 민주화의 성지이자 상징으로 떠올랐다.

한국 역사에서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가 민족 사회에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보여 주는 이같은 사례는 동아시아 복음화 역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교훈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오랜 식민 지배 동안 그리스도교를 강요하며 이식하고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아시아에서 복음화가 저조한 현실을 설명하는 한 결정적 인자(factor)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사실은 한국 교회가 세계 가톨릭 교회와 함께 아시아의 복음화를 수행할 한 중요한 방향을 알려 준다고 할 것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