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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교회가 간다Ⅱ] 44.일본 (3)신앙선조 발자취 따라 간 ‘고또섬’ 순례

이지연 기자
입력일 2007-04-29 수정일 200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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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자유의 ‘희망’은 ‘피’로 물들고

박해 피해 섬에 숨었지만 원주민 핍박 이어져

은신처 마련…세상과 단절된 신앙공동체 이뤄

아직 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른 아침. 일본 신자들이 꼽는 자랑스러운 기억, 250여년 전 그들 신앙선조의 발자취를 따르는 여정이 시작됐다.

나가사키 항에서 2시간 가량 배를 타고 나가자 저 멀리 고또섬의 육중한 검은 몸이 수평선 위로 드러났다. 머나먼 세월,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섬을 찾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일본 신자들 역시 우리 신앙선조가 겪은 고초를 경험해서일까? 처음 가보는 고또라는 섬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고또섬의 슬픈 내막

후쿠에, 나카도리 등 크고 작은 대여섯개 섬으로 이루어진 고또에는 약 10만 명의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성당 19개와 공소 30여개가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의 여느 시골마을과 마찬가지로 일자리와 자녀 교육문제로 인해 젊은이들이 육지로 나가면서 신자 수가 많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고또섬에 신자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797년이다. 당시 천주교를 믿었던 나가사키현 소토메 지역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현재 섬에 거주하는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고자 이주해온 이들의 후손들이 대부분.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고또섬에는 가톨릭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바로 거주민들의 조상이자 일본 신자들의 신앙선조들이 피비린내 나는 순교를 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섬에서조차 가톨릭에 대한 핍박이 시작된 것은 그들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신앙에 대한 자유를 약속했던 관리들과 원주민들이 사교(邪敎,건전하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종교)라는 이유로 그들을 배격했기 때문.

대부분 불교신도였던 원주민들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좋은 땅 대신 척박한 땅이나 험준한 산 속에 자리를 내주었다.

겨우 자리를 잡은 메마른 땅에서는 입에 풀칠할 만큼의 양식도 얻을 수 없었다. 원주민들의 텃세로 바다 근처로도 내려갈 수 없었다. 고작 산 속에서 나물이나 풀, 나무뿌리 등을 캐어먹는 것이 전부였다.

핍박은 계속 됐고 곧이어 섬 내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처절한 살육이 시작됐다. 신자들을 보았다하면 체포해 고문하기 일쑤였다. 사무라이들은 새 칼을 시험하기 위해 신자들을 택했을 정도다.

신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단지 가톨릭을 믿는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죽어나갔다. 주님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찾아온 ‘자유의 섬’은 그렇게 ‘죽음의 섬’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택한 길은 더 깊은 곳으로 숨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본토에서 고또로 쫓겨 들어온 신자들은 육지보다 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됐다. 추위와 배고픔, 두려움으로 살을 찢는 고통의 나날들이 계속됐다.

1889년. 금교령이 풀린 이후 더 이상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시대가 왔지만 세상과 소통하기를 두려워했던 그들은 여전히 산 속에서 숨어 지냈다. 불교신도가 많은 섬에서 전교는 고사하고 쏟아질 비난과 돌팔매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그저 섬 깊은 곳에 숨어 그들만의 마을을 구성하고 성당도 만들며 지금까지 조용히 주님에 대한 믿음을 키워왔다.

현재진행형인 일본교회

본토만큼 박해가 심했던 고또섬에 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1882년.

종교의 자유가 차츰 인정되고 있는 시기였지만 신자 대부분이 숨어 살았던 탓에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 가장 전경이 아름다운 곳은 ‘키리 성당’. 높은 절벽에 위치해 아름다운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이곳은 메이지 30년(1897년) 프랑스인 퓨젠 선교사에 의해 나카고토 최초의 성당으로 설립됐다.

다음은 인근 주민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라고 하는 ‘오오소 성당’. 성당 뒤편으로 지금은 폐허가 된 교우가정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 쳤던 당시 일본 신앙선조의 눈물겨움이 한눈에 묻어난다.

고또 북쪽 나카도리섬 깊숙한 곳에는 신자들의 마을 ‘하마구찌’라는 곳이 있다. 옛 한국 교우촌의 형태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 항구지만 외딴 장소이기 때문에 그나마 신자들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듯하다. 항구를 지나는 이들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방파제 끝 성모상이 눈길을 끈다.

고또에서 가장 큰 후쿠에섬 북쪽에 위치한 ‘미즈노우라 성당’. 이곳에서는 주일이 아니면 신자들을 만나보기 어렵다. 성당 평일 새벽미사에서 몇몇의 신자들만 참례하고 있을 뿐이다. 순박한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을 한 일본 평신도들이 새벽미사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마지막으로 고또섬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한 성당으로 유명한 ‘도자키 천주당’. 일본 성인 26위 중 한명인 ‘성 요한 고또’ 상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뱃길을 통해 미사를 보러오는 신자들을 위해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신자들은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 몇 킬로미터를 걸어 혹은 배를 타고서라도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척박한 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본 신앙선조들의 흔적.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험한 곳까지도 그리스도인의 발자취가 남아있었다.

특히 강한 바람이 부는 해변가 절벽에 위치한 천주교인들의 무덤은 죽음까지도 편안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듯 했다.

오랜 기간 동안 박해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지켜온 신앙인의 희생과 인내가 있었기에 지금 현재 일본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다.

일본교회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당장은 뿌리 깊은 전통신앙으로 인해 가톨릭의 교세가 약하고 성장률이 낮을지라도 순교자와 함께 그 저력은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인권 무시당한 채 감금

신자 가둔 창살 없는 감옥 ‘로야’

로야는 10평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으로 신자들을 가두는 창살 없는 감옥이다.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철조망으로 신자들의 거주 지역을 마련한 것이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신자라면 누구나 이곳에 거주해야만 했다. 화장실도 따로 없이 비좁은 곳에서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동안 생활했다.

뿐만 아니라 로야에서는 얇은 옷 한 벌만 걸치고 사계절을 견뎌야만 했으며 심한 고문도 당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로야는 현재 쿠즈하라, 히메시마, 미즈노우라 등 4군데에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신자들은 희생된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서 그곳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쿠즈하라 로야에는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신자들의 생활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사진말

▶해변가 척박한 땅에 위치한 교우들의 무덤. 해변가 절벽에 위치한 천주교인들의 무덤은 죽음까지도 편안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미즈노우라 성당에서 새벽미사에 참례하고 있는 고또섬 신자들.

▶쿠즈하라 로야에 전시돼 있는 메이지 30년경 로야에서 생활했던 교우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