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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신부이야기] 19. 흙밭과 마음밭

입력일 2007-03-11 수정일 200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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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의 ‘마음 밭갈이’

흙밭에 씨앗을 뿌리는데 씨앗들은 다 작고 둥글다. 과일도 둥글다. 사람도 제대로 된 사람은 둥글다. 사람이 살다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둥글둥글 해야 하는데, 노취(老醜), 노욕(老慾)에다 노태(老態)까지 부리게 된다. 얼마나 부끄러운 인생인가.

마음을 바로 쓰고 마음을 제대로 잘 가꾸어 가는 사람만이 마음농사를 잘 짓는 농부이듯이, 서로의 아픔과 부족함을 감싸 안으며 모난 마음도 둥근 마음도 뾰족한 마음도 둥글둥글하게 만드는 마음 농사꾼이 되길 바래본다.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 19)

우리에게도 흙밭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흙밭이 아니라 마음을 가꾸고 밭을 이루는 마음의 밭을….

농부들에게는 ‘몸 달력’이라는 것이 있다. ‘몸 달력’은 오랜 세월 농사를 지으며 자연현상에서 배워 익힌 자연력의 지혜를 몸의 노동으로 제때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다. 어르신들은 진달래 꽃망울이 맺히면 감자를 심고, 찔레꽃 향이 나면 모내기를 한다. 또 뻐꾸기 울음이 맑고 멀리 퍼지면 가뭄이 심해진다고 미리 신경을 쓴다. 맹꽁이가 울면 무슨 꽃이 피는지, 아카시아 향이 마을을 뒤덮으면 모판에서는 무슨 변화가 있는지 잘 살펴본다.

때론 무릎을 꿇고 때로는 까치발을 딛고 귀를 활짝 열어 놓고 세상을 두루 관찰하는 여유도 필요할 것 같다. 때로는 새의 시각에서 때로는 뱀의 시각에서. 몸의 감각과 감성이 생태계와 두루 대화하는 ‘몸 달력’이 만들어지도록 말이다.

그 동안 난, 내 자신이 꽤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해왔고 세상을 살아왔다는 오만과 편견 속에 살아왔던 것 같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가장 마음을 터놓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너무나 마음이 혼란스러웠고 그동안 소홀히 생각해왔던 ‘마음 공부’에 대해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된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마음 공부’는 ‘용서와 화해’라는 단어로 귀결 지을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 본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소중한 것들(사람, 사물, 자연)이 더없이 귀하고 사랑스러워 보일 때가 곧 ‘마음의 밭갈이’는 절정을 이루어 아름다운 오케스트라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시간부터 더 넓고 열린, 더 둥근 마음으로 내 마음의 주인인 나 자신부터 배려하고 사랑하며 감싸 안으련다.

갯가의 버들개지가 회색 빛 실눈을 뜨고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듯, 나의 마음 밭에도 벌써 봄의 전령은 다가오고 있다. 겨울바람이 새싹으로 걸어 나오는 달(3월)의 설레임을 가득 안고서….

허정현 신부 (수원교구 당수성령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