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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다시 ‘신과 북’의 이미지로: 생명의 섬김과 소통을 향하여

입력일 2007-03-11 수정일 200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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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정화’ 실천해야

공동체란 소통의 장이고, 지도자는 하느님의 뜻을 소통시키며 섬기기 위해 있다고 하였다. 이 생명의 소통과 섬김의 관점에서 다음 대목을 보자.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 9, 43~47)

지옥은 죽지 않는 벌레와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으로 하느님 나라는 영원한 ‘생명계’로 표상 되었다.

이 지옥과 천국이 각각 죄짓는 이들과 죄의 원천을 끊고 죄를 피하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손과 발로 죄짓기보다는 차라리 끊어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체를 천대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손이나 발이나 눈일지라도 만일 죄를 짓게 만든다면 그것들을 포기할 각오로 죄짓지 말라는 강력한 경계이자 초대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코 자신이 이미 이 앞에 다음의 진술을 배치함으로써, 공동체의 맥락에서 이해할 길을 열어놓았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42절)

말하자면 한 공동체에서 잘못된 길을 걷게 하여 죄짓게 만드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것보다 더 못한 죄라는 것이고,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죄가 죄를 낳을 가능성을 전제한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된 죄짓게 하는 손은 무죄한 이들이 피 흘리게 만든 손(집회 6, 18)을, 죄짓게 하는 눈은 교만하고 탐욕스런 눈(집회 6, 17; 27, 20)을 떠오르게 한다.(J. 그닐카, 마르코 복음 II, 90)

앞서 본 것처럼 죄란 언제나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가로막는 불소통과 하느님의 원축복을 가로채는 불의를 낳기 때문에, 죄 자체가 이미 공동체와 관계된 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의 결합과 연대의 관점에서 신앙 공동체를 바라본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비전이 주목된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 코린 12, 26~27)

그렇다면 이 같은 ‘몸으로서 공동체’ 비전에서 마르코의 저 죄짓지 않기 위하여 끊어야 할 지체란 누구이고, 그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앞에서 ‘야훼의 신과 북’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신발이 비지 않고 바닥에 있지 않으면, 제구실을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십자가는 야훼의 ‘신의 신’으로서 자기 비움과 바닥 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야훼의 북은 자기를 비우고는 두들기는 채에 자기를 내어맡길 때 비로소 야훼의 소리가 울려 나게 한다.

야훼께서 바라시는 생명의 다스림을 소통시키고 섬기는 데 요청되는 비움과 바닥됨, 야훼의 메시지를 발생시키는 데 필요한 자기 비움과 두들겨짐, 이것을 일그러뜨리고 전도시키는 것이 죄다.

위의 말씀은 이런 식으로 죄를 짓기보다는 공동체에서 스스로 떨어져서 공동체의 건강과 구원을 돌볼 수 있어야 하리라는 초대로 들린다.

실로 이러한 결단으로 이루어 가는 ‘자발적 정화’야말로, 그 주체가 누구이든 성직자든 수도자든 평신도 주부든 교사든 기업인이든 정치가든 정비사든, 그 자신에게도 신앙의 건강과 구원을 돌보는 정도(正道)가 될 것이다.

군림하려는 영들은 언제나 가로막는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생명의 소통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영의 섬김을. 창조물 서로간의 사랑의 돌봄을.

이제 풀자. 이름이나 직분이나 신분주의에 갇힌 권위주의와 독선을. 비합리적 관계와 비창조적 안일주의를.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비움과 섬김의 영으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는 신행(神行, theo-practice)을 통해서 하느님의 살리는 축복을 소통시켜 가자, 하느님의 백성아.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