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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촌 영성] ③교우촌 신앙인들의 생활 양식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6-09-17 수정일 200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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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신부를 중심으로 신자들이 모여 송별촬영을 하고 있는 1900년대 초 한 공소마을 모습.
“한 형제로 무엇이든 함께 나눠”

어려운 이웃, 고아 돌보며 주님 사랑 전해

시대보다 100년 앞서 ‘평등정신’ 실천

가난했다. 박해를 피해 급하게 이주한 탓에 집도 없었다. 사람과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산지에 토담을 쌓고 갈대로 거적을 쳐서 눈보라와 추위를 막았다. 칡뿌리와 나무껍질, 머루나 산딸기로 매일 허기를 채워가며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 병에 걸려도 치료받을 길이 없었다. 몇몇 교우촌 회장들이 의술로 전교활동을 벌인 이유도 당시 열악한 의료 사정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굳은 신앙심으로 뭉쳐 서로 위로하며 돕고 사랑하면서 교우촌을 형성해 갔다.

그리고 회장의 지도 아래 생산과 소비를 공동으로 영위했다. 수원교구 비봉 쌍학리 교우촌, 안동교구 봉화 우련전·곧은정 교우촌 등에서는 재산을 공유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이 모습을 바라본 프랑스 선교사들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심지어는 사도 시대의 신앙공동체에 비유하는 사제들도 있었다. 한 사제는 “마치 내가 초대 교회에 와 있는 듯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 사학자들은 “교우촌처럼 완벽한 초기 교회 모습을 재현한 공동체는 없었다”고 말한다. 한국교회 교우촌은 성서 말씀을 철저히 실천한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당시 한 프랑스 선교사의 편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새로 입교한 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 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 교회에 와 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애찬을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예비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1889. 4. 22. 보두네 신부의 편지)

교우촌 신자들은 함께 나누는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을 직접 실천했다. 어려운 이웃은 물론이고 부모 잃은 어린이를 힘써 돌보았다. 또 죽을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세(代洗)를 주어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했다.

이처럼 교우촌의 정신은 ‘평등정신’으로 요약된다. 이들은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함을 행동으로 드러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면 그들은 서로가 한 형제로 뭉쳐 나아갔다. 신자들이 이룩한 신앙 공동체 안에는 양반도 중인도 없었다. 말 그대로 교우(敎友), 신앙의 벗이었다.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가 상하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였다. 당시 유교적 전통에서는 실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실제로 ‘유군명’ 등과 같은 신자들은 영세 직후 자신이 거느리던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당시 천주교에 입교한 양반들이 자신들의 노비를 해방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우리나라에서 사노비가 해방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교우촌 신앙인들은 이보다 100여 년을 앞서 노비를 해방시킨 것이다. 교우촌은 가난한 이들이 모여, 가난 속에서 살며 사랑을 실천한 공동체였다.

1790년대에 입교한 백정 출신 황일광(黃日光, 1756~1802년)은 입교 후 교우들한테 받은 평등한 대우에 감격하여, 자신은 지상 천국에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교우촌은 지상천국이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