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라져가는 교우촌을 찾아서] 1.쌍학리 교우촌(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6-09-03 수정일 200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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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기도 안하면 잠도 안재웠지"

“이곳은 신앙선조들이 피와 눈물로써 다듬은 교우촌입니다.”

그러나 집이 보이지 않았다. 인적도 끊어진지 오래된 듯 싶었다. 좁은 계곡을 한참동안 더듬어 올라 간신히 만난 교우촌(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쌍학1리). 1997년에 설치한 낡은 입간판만이 과거 이곳이 교우촌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교우촌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우촌의 정신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수원교구 비봉본당 김민호 신부는 “이곳만 해도 이농현상으로 젊은이들이 거의 떠나 몇몇 노인만이 간신히 교우촌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병구(안토니오.61) 교우촌 회장과 그 동생인 이한구(다윗.59)씨, 신영균(미카엘.63)씨를 만난 것은 그때였다. 모두 아랫마을에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들이 어릴 때 만해도 묵주기도를 하지 않으면 부모님이 잠도 재우지 않았어요. 우리 마을 사람들이 다 그랬어요.” 쌍학리 교우촌에는 한때 30호까지 생활했지만 지금은 이 회장 가족을 비롯해 3~4세대만 남아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신앙가족도 60대 이상이 대부분. 젊은 층은 직장을 좇아 모두 도시로 떠났다.

이병구 회장의 증조부 이선호(안드레아)가 신앙의 땅을 찾아 쌍학리에 정착한 것이 120여년전. 이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 살면서 자연스레 교우촌이 형성됐고, 함께 담배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쌍학리 교우촌은 이후 이선호의 아들 이의수(요셉.이병구 회장의 조부)에 의해 번영기를 누리게 된다. 라틴어와 불어, 의술에 능했던 이의수는 의술을 통해 선교활동을 벌였고, 당시 마을에 거주하던 대부분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에 귀의했다. 이때 이의수에 의해 세례를 받은 신임(야고보)의 손자가 바로 신영균씨다.

“100년전만해도 유아 사망률이 높아, 아이가 태어나면 3일내에 교우촌 회장님이 세례를 줬어요. 우리들도 모두 그렇게 세례를 받았지요.”

신영균씨는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 교리서를 몽땅 외우고, 엄격한 찰고를 받으며 벌벌 떨던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아마 우리가 과거에 하던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면 못할겁니다.” 이병구 회장의 동생 이한구씨는 “교우촌 식구들은 먹을 것이 있으면 함께 나누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슬퍼했다”며 “함께 기도하고 생활한 과거 교우촌의 전통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나마 지금의 교우촌 터도 지킬 수 없을 뻔했다. 10여년전 교우촌 터가 다른 사람에게 팔려 개발될 위기에 처했는데, 이상각 신부(현 남양성모성지 전담)의 안목으로 지켜낼 수 있었다.

김민호 신부는 쌍학리 교우촌 복원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교우촌이 사라지면 뿌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늦기전에, 교우촌의 기억을 갖고 있는 노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교우촌을 사적지화 해야 합니다. 신영세자나 예비신자들이 직접 이곳에 찾아와 과거 신앙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 잊은 것이 있습니다.” 김 신부가 신영균씨를 가리키며 “딸 셋을 모두 수도자로 봉헌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신씨가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라며 부끄러워했다. 김 신부가 손을 내저으며 겸손해 하지 말라고 했다.

“만약 교우촌이 없었다면 세 딸이 과연 수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철저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신앙을 함께 살았던 교우촌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는 겁니다.” 외롭게 교우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세 노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우촌 순례 문의 : 비봉본당 031-355-2254

◎19세기 초 형성 … ‘이의수 회장’때 전성기

신앙 명맥 이어가는 쌍학리 사람들

고 한종호(베드로)씨는 ‘남양지역 천주교 전례과정의 고찰’에서 쌍학리 교우촌의 기원을 1800년대 초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생존한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구체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시기 혹은 전성기는 대략 1800년대 후반으로 보인다.

그 중심에 이의수(요셉.1888~1969) 회장이 있다. 처음 쌍학리 교우촌을 일구었던 이선호(안드레아)의 아들인 이의수 회장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 일찍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라틴어와 불어 등 신학문을 배웠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성직의 길을 접고, 집으로 돌아온 이 회장은 이후 한의학을 배워 지역주민들에게 의술을 베풀며 선교활동에 주력했다.

이 때 담배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상당수 주민들이 이 회장의 후덕한 인품에 감화돼 가톨릭 신앙에 귀의 했으며 이는 쌍학리 교우촌의 전성기로 이어진다. 초창기 3~4가구에 불과하던 신자가구가 30여 가구로 늘어나며 쌍학리 일대가 신앙촌화 한 것도 모두 이 회장의 노력 때문이다.

이의수 회장은 이후 1969년까지 교우촌 회장 직분을 유지하며, 교우촌 발전을 위해 힘썼다. 이 회장은 기도생활과 성덕 실천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마을에 길흉사가 있으면 늘 앞장서 문제를 해결하는 등 도움을 주었다.

한국 전쟁 때 행방불명된 이여구(마지아.1897~1950) 신부도 쌍학리 교우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신부의 조부 이상규(도마.1852~1937)는 내포지방 박해를 피해 경기도 산본 수리산에 이주했다가, 의왕을 거쳐 쌍학리로 왔으며 이때 이여구 신부가 부제품을 받았다.

사진설명

▶쌍학리 교우촌 입구에 붙은 안내문. 오늘날 교우촌은 사라지고 그 후손 3~4세대 노인 가구만이 아랫마을에서 교우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비봉본당 김민호 신부와 이병구 회장이 옛 교우촌 터를 둘러보고 있다.

▶쌍학리를 지키고 있는 신영균, 이병구, 이한구씨(왼쪽부터)가 교우촌의 부활을 기원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