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48】Ⅳ 부활과 재 탄압/3. 신앙의 자유, 4. 조선인 기리시탄의 어제와 오늘

박양자 수녀
입력일 2006-01-22 수정일 2006-01-22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장하다! 일본 기리시탄 박해사에 빛나고 있는 조선인 순교자들이여!
1889년 일본헌법‘신교의 자유’ 공포

3. 신앙의 자유

1873년 3월 우라가미 신자 귀향조치 발령이 내려짐에 따라 고향에 돌아온 자는 1900여명이었다. 츠와노 유배지에서 돌아온 센우에몬은 마을 재건과 전도와 자기 수련으로 일생을 보냈다. 젊은 처녀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고아양육과 복지사업, 자기수련 가운데 혹독한 박해의 역사를 애덕의 꽃으로 장식하였다.

메이지 정권은 1873년 금제판을 철거하고 잠재적 신앙자유를 허락하다가 1889년 일본헌법 제28조에 다음과 같이 공포하였다. ‘일본신민은 안녕과 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신민의 의무를 거역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신교의 자유가 있다.’

4. 조선인 기리시탄의 어제와 오늘

일본 곳곳에 조선인 기리시탄의 후손들(지금은 일본인이 되었지만)이 그 신앙을 이어받아 오늘을 살고 있겠다. 조선도공의 마을 이마리와 아리타, 가고시마 하기, 히라도 등에서도 잠복 기리시탄이 가톨릭으로 귀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메이지박해 때의 조선인 순교자도 있다. 그들을 찾는 것도 다음 과제가 되겠다.

한편, 아직도 잠복 기리시탄 신앙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이래 500년을 바라보고 있는 일본 가톨릭교회는 이들이 지켜온 굳건한 신앙이 그 뿌리였다.

한국 교회도 순교자들의 피로 자라 풍성해진 교회이다. 특히 이국땅에서 포로와 노예 신분으로 무시와 천대 그리고 온갖 고통을 오직 신앙을 얻었다는 행복감으로 순교까지 한 영광스런 하느님의 백성, ‘종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조선인 순교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신앙을 얻었다는 행복으로 언제 어디서나 세상의 온갖 유혹과 고통을 이겨내고 흔연하게 일어나자.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필자는 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에서 일하며 일본에서 순교한 포로 조선인들을 10년간 짝사랑하였다. 그 동안 잊혀져 온 이분들께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오늘에서야 이 말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동경 성심대학원의 야마자키 기리시탄 연구소 교수님, 자료를 많이 제공해주신 스미즈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 작고하셨지만 조선인 기리시탄 사료발굴에 공로자이신 메디나 신부님께도 감사와 존경을, 그리고 일본의 기리시탄 사학자들이 각 저서에 조선인들을 산발적으로나마 언급해 주신 것도 감사드린다.

일본 체재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 특히 사토미술공예진흥재단의 사토 회장님과 부인, 규슈 일대의 성지를 손수 운전하시며 순례를 시켜주신 하세베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본회의 순교자 현양 정신의 뜻을 잇기 위하여 이 글을 쓰게 해 주신 창설자 마뗄, 뿌로마뗄께 이 글을 올리며 그동안 어설픈 글이나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가톨릭신문사측에도 감사드린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박양자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