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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Ⅳ 부활과 재 탄압/2. 메이지의 탄압/2) 우라가미 신자 총 유배, 3) 이마리 기리시탄 사건

박양자 수녀
입력일 2006-01-15 수정일 200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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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와노 감옥터에 세워진 산타 마리아 당.
하루종일 눈속 방“그래도 배교는 안해”

2) 우라가미 신자 총 유배

1868년 5월 메이지 정부는 ‘우라가미 부락민 총 유배’라는 처분을 내렸다. 1868년 7월 180명의 지도자와 열심한 신자들을 1차로 하기(萩), 츠와노(津和野), 후쿠야마(福山)로 유배시켰다.

2차로 각호의 호주 700여명을, 다음날은 그들의 가족 모두를 검거하여 전국각지 21여개 소로 유배시켰다(3394명). 신자들은 이 유배를 ‘여행=旅’이라 하였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이 각각 다른 데로 유배된 자가 많았다. 하기와 츠와노에 유배된 자는 특히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체험담을 우라가와 와사부로(浦川和三郞) 주교의 ‘旅의 이야기’중에서 하나만 옮겨본다.

하기에 유배된 즈루(22세)는 폭설이 계속되는 날, 속치마 하나 걸치고 눈 속에 무릎을 꿇은 채, 하루 종일 밥 한술 먹지 않고 그대로 내 버려졌다.

아침이 되면 또 다시 시작했다. 일주일 간 계속 되던 날, 눈코도 뜰 수 없는 대설이 왔다. 즈루는 죽음을 각오하였다. 눈 속에 파묻혀 검은 머리만이 흰눈 위에 보이게 되었다. 무릎이 아프고 시리고 이가 덜덜 떨려오고 사지가 후들후들 떨리다 못해 마비되었다. 그러자 감시인 두 사람이 와서 “배교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도록 내버려 둘 거야”하면서 끌어내어 장작불 옆에 갖다 놓았다. 이 때의 괴로움은 눈 속에 있을 때보다 더 하였다. 몸이 녹으면서 찔리는 듯 아프고 온몸은 퉁퉁 부어올랐다. 감시인이 “어떠냐. 말해 봐”하고 말하자 즈루는 “친절히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어떠한 고문을 받더라도 배교는 할 수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3) 이마리 기리시탄 사건

이마리(伊万里)는 규슈 북서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다. 이웃의 아리타(有田) 도자기제품을 유럽에 수출하여 해외에서는 이마리 도자기로 알려져 왔다. 아리타 자기(有田燒)는 일본 도자기 산업의 대표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포로 조선인 이참평(李參平)이 그 시조이다. 그 후손들이 아리타와 이마리에 살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도자기 도시로 번창하다.

이마리의 후카보리(深堀) 마을에 잠복 기리시탄들이 있었다. 이들도 오우라 천주당을 방문하고 선교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공연히 표명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1871년 12월 중심인물 70명을 포박하였다. 때는 우라가미 신도들이 각 지방으로 유배된 사실에 구미 각국에서 비난이 거세어져서 외교상의 중대한 현안으로 떠올라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사태악화를 막기 위하여 이마리 기리시탄들을 다음해 2월에 모두 방면하였다(1명 옥사). 이 사건이 요코하마 외국신문에 ‘박해를 중지하고 신교의 자유를 구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기사화 됐다.

때마침 메이지 정부의 사절단이 서구문물의 시찰과 조사 및 불평등조약개정의 예비교섭을 목적으로 구미제국으로 떠났다. 사절단은 가는 곳 마다 기리시탄 박해에 대하여 거센 항의를 받았다. 각국은 조약개정교섭의 전제조건으로 신교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교에 관한 정책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리하여 1873년 2월 기리시탄 고찰(금제팻말)을 철거하고 각지에 유배된 우라가미 신자들을 석방 귀향조치 하게 된 것이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박양자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