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73】21세기 영성(4) - 증거영성

입력일 2005-06-05 수정일 200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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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의무 아닌 신바람 돼야

의무 지향적 교리 중심 벗어나 체험 매개하는 성서 교육 필요

젊은층의 교회이탈

2000년대에 들어와서 젊은층 신자들의 교회이탈 현상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2003년 말 기준 한국 가톨릭교회 교세 통계를 보면 전년 대비 신자 연령별 증감 현황에서 40세 미만의 연령대는 모두 충격적인 수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6세 이하 연령대의 신자 증감률은 -18.4%, 7~19세 연령 대는 -9.1%, 20대 청년층은 -7.7%를 보였다. 특히 가장 왕성하게 활동을 해야 할 30대 청년층이 -7.2%를 기록했다.

이러한 추세가 몇 년간 누적되면서 빚어진 결과는 참담하다. 2005년 한국 갤럽 조사(한미준 한국갤럽, 「한국교회 미래리포트」, 2005)에 의하면, 종교 내 청년인구(18~29세) 비율에서 개신교는 44.1%, 불교는 35.1%를 기록하고 있으나 가톨릭교회는 16% 대에 그치고 있다. 이를 절대 수치로 환산하면 청년 신자 비율은 가톨릭 1명당 개신교 7.26명, 불교 7.14명으로 나타난다. 이는 전국민에 대한 신자비율이 가톨릭 8.2%, 개신교 21.6%, 불교 26.7%임에 비할 때 대단히 저조한 수치인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러한 이탈현상은 기존 가톨릭교회의 「의무」신앙에 대한 포스트모던 세대의 노골적인 불만의 표출로 해석할 수 있다. 즉, 40대 미만 층의 가치관에 비추어볼 때 가톨릭교회가 「재미없고」(전례), 「고리타분하고」(교리), 「부담스럽기」(교회법) 때문에 기피한다고 보면 된다. 오늘날 소비자의 구미는 까다롭고 냉정하다. 실망하면 물건을 가차 없이 바꾼다. 더 좋은 것을 만나면 옛것을 미련 없이 버린다. 설마설마 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필자는 가톨릭교회가 「의무」 신앙의 이미지를 벗고 「신바람」 신앙의 이미지를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동안 젊은이들에게는 「가톨릭」이나 「성당」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부담」, 「엄격함」, 「딱딱함」 등등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었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가 미래에 살아남고자 한다면 이런 이미지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성당」 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신바람 나는」, 「즐거운」, 「웃음이 가득한」이라는 이미지가 되어야한다. 결론적으로 종래의 「의무」 신앙이 「신바람」 신앙으로 틀바꿈, 탈바꿈을 해야 한다.

교리에서 성서로

어떻게 해야 신바람 신앙을 일으킬 수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신바람 신앙은 교리(敎理) 중심의 신앙교육에서 성서(聖書) 중심의 신앙교육에로 전환될 때 비로소 형성된다고 본다. 교리 중심의 신앙교육은 「믿을 도리」와 「지킬 계명」 등등의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의무」 지향적이었다. 하지만 성서(聖書) 중심의 신앙교육은 숱한 선배 신앙인들의 하느님 체험과 예수님 체험을 매개해 준다.

이는 하나의 주장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증언이다. 필자는 미래 한국천주교회의 사활은 예비신자 교리교육과 신자 재교육을 위한 신바람 나는 프로그램에 달려있다고 보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해 왔다. 이것이 과분하게도 많은 신부님, 수녀님, 교리교사들, 그리고 예비신자 및 교우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교리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 성서 중심 교육을 지향했더니,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마치 엄격한 윤리 도덕을 지키듯이 신앙생활을 해왔던 이들이 『주님은 정말 살아 계셨군요. 참으로 좋으신 분이시군요』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 『신앙 생활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어요』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증거(martyria) 영성

성서는 체험의 기록이다. 그리스도교는 체험의 종교, 만남의 종교이다. 뜨거운 감동이 있는 종교이다.

욥이 환난을 겪고 있을 때 개념(槪念)의 하느님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욥을 구했던 것은 체험(體驗)의 하느님이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기 42, 5).

욥은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은 이러저러한 분이라는 것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냥 객관적으로 「하느님」 또는 「그분」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욥은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 이 하느님을 직접 만났고 체험했다. 마침내 하느님을 나의 「당신」으로 보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는 주님을 만나 뵙고 가슴 뜨거워짐을 체험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루가 24, 32).

복음을 전하지 말라며 박해를 하던 유다인 원로회의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사도 4, 20).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까 증거(證據)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거는 체험을 전제로 한다. 팔삭동이 같은 자신에게 무한한 은총을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읍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 16).

누린 만큼 증거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증거(Martyria)는 본래 순교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복음 증거의 사명(마태 28, 19~20 참조)은 마르티리아의 언어적 의미 그대로 고난을 견디어내며 기꺼이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복음은 개념이 아니고 체험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 선포는 주장이 아니고 증언인 것이다. 곧 예수를 그리스도로 먼저 체험한 이들이 다른 이들을 그 체험에로 초대하는 증거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증거 영성은 자신의 전 실존이 먼저 예수를 그리스도로 체험하고 그 체험을 이웃에게 나누는 영성을 의미한다. 곧 먼저 자신의 모든 의문, 문제, 욕구에 대한 답을 예수님 안에서 만나고 그 예수님을 다른 이에게 소개하는 영성을 말한다.

요즈음 도처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노숙자들, 실직자들, 성격파탄자들, 절망 속에서 마지막 탈출구로 죽음의 길을 찾는 이들, 착취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탈북자들 등등 울부짖는 이들의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영적 목마름의 탄식 또한 애절하다. 신자건 비신자건 평화를 갈구하고 하느님 체험을 목말라하면서 엉뚱한 곳을 헤맨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 기쁜 소식, Good News 이다. 딱딱한 교리, 읽지 않는 성경책이 아니라 만능 해결사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해방자(루가4, 16~21)로서, 때로는 치유자(마르1, 40~42)로서, 때로는 착한목자(요한10, 1~6. 10~16)로서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도 죄와 죽음과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접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 이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