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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1세기 영성(2) - 복음영성

입력일 2005-05-22 수정일 200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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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용서와 구원의 은총

복음을 중심으로 신나게 살고 실존을 부축하는 복음 전해야

우도, 장발장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역사 이래 최고의 횡재를 만난 사람을 꼽으라면 반드시 우도가 몇 손가락 안에 꼽혀야 할 것이다. 아니 참으로 무엇이 귀한 것인지를 볼 줄 아는 사람에게라면 의당 첫 번째로 꼽혀야 할 것이다. 촌각이 급한 상황에서 「툭」 던진 말 한 마디로 천국을 약속 받은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는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간청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루가 23, 42).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예상치 않은 약속을 선언하셨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 43).

이는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용서의 선언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충격이요 파격이었다. 살인강도에게 선언된 이 파격적인 특은에 대하여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7~407)는 이렇게 묵상했다.

『이 도둑이 드디어 낙원을 훔쳤구나! 이 사람보다 앞선 사람들도 일찍이 아무도 그런 약속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모세를 비롯하여 많은 예언자들과 사도들 가운데에도 그러한 약속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도둑은 그들을 모두 제치고 앞서고 말았구나!』

그는 하느님의 자비심이라는 틈새를 기어들어가 천국을 훔친 희대의 도둑이었던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빵을 훔친 죄로 19년 간 중노동을 선고 받은 장발장은 감옥에서 출소한 후 길을 헤매다 한 신부의 자비로 성당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러나 장발장은 신부가 잠든 사이 은잔을 훔쳐 어둠 속으로 달아났고, 곧 경찰에 의해 붙잡혀 성당으로 끌려온다. 그러나 신부의 반응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다시 오셨군요!』

신부는 장발장에게 큰소리로 말한다.

『참 다행입니다. 제가 촛대까지 드렸던 것을 잊으신 모양이죠? 그것도 은이라서 족히 200프랑은 나갈 겁니다. 깜박 잊고 놓고 가셨나요?』

과오도 인정하지 않은 장발장을 용서한 이 감동적인 장면은 모두에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후 촛대를 은총의 소중한 상징물로 간직한 그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여생을 바친다.

두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조건적인 용서의 강력한 파장에 공명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풀기 위해 예수님께서 얼마나 멀고 먼 길을 오셨는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죄인에 대한 문제라면 하느님은 그냥 팔을 벌리고 서서 「이리 오라」고 단지 말씀만 하시지 않는다. 줄곧 서서 기다리신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 아니다. 그분은 서서 기다리시지 않는다. 찾아 나서신다. 마치 목자가 잃은 양을, 여인이 잃어버린 동전을 찾아 나선 것처럼 그분은 찾아 가신다. / 아니다. 그분은 이미 가셨다. 그 어떤 목자나 여인보다 무한히 먼 길을, 진정 그분은 하느님 신분에서 인간 신분이 되기까지 무한히 먼 길을 내려오셨다. 그렇게 죄인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복음

복음은 말뜻 그대로 「기쁜 소식」, 「희소식」, 「복된 소식」을 말한다. 복음이 진정으로 「기쁜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슬픈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슬픈 현실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죄, 그리고 그것으로 초래된 현실적 불행(고통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가리킨다.

동서를 막론하고 죄인에게는 응분의 벌이 기다리고 있으며 죄인에게 미래는 곧 심판의 때요 좌절의 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성종교들의 신념이었다. 힌두교와 불교의 업보사상이나 유다교의 상선벌악에 대한 믿음은 죄인들에게는 철퇴와 같은 것이었다. 바로 이런 슬픈 현실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었던 것이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복음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 제사를 통하여 이 복음을 온전히 구현하셨다.

그런데 복음은 은총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공짜」로 주어지는 용서와 구원을 의미하는데 바로 이처럼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을 「은총」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로 복음이며 은총의 선포인 것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물과 젖을 사서 마셔라』(이사 55, 1).

그렇다. 「돈 없이」, 「값없이」 누리는 구원의 선물, 이것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로 값을 지불하였던 것이다(1베드 2, 24 참조). 이 소식을 우리는 복음이라 부른다. 이 사실 자체를 우리는 은총이라고 부른다.

복음영성

복음영성을 우리는 복음을 누리고 복음을 나르는 영적생활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복음영성은 복음을 「누리는」 삶을 말한다. 말 그대로 거저받은 용서, 공짜로 받은 은총을 누리는 삶을 말한다. 스스로에게 정직해 볼 때, 가톨릭교회는 복음을 소홀히 여겨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는 「복음화」를 말하면서 복음을 왕따시켰다. 정작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때 의무조항 투성이인 교리를 가르쳤고, 복음서를 윤리도덕 책으로 전락시켰고,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강론대에서 성서 말씀보다 오히려 불경이나 논어를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영적상담의 자리에서는 심리학으로 복음을 대체했고, 성서공부의 현장에서는 성서 주변지식으로 복음묵상을 몰아냈다. 우리는 성서보다 교회문헌 인용하기를 더 좋아했다.

이제부터라도 복음중심으로 살자. 그러면 신앙생활이 홀가분해지고 기뻐지고 신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복음영성은 복음을 「나르는」 삶을 말한다. 복음을 나르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슬픈 현실을 볼줄 알아야 한다. 요즈음 도처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노숙자들, 실직자들, 성격파탄자들, 절망 속에서 마지막 탈출구로 죽음의 길을 찾는 이들, 착취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탈북자들 등등 울부짖는 이들의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영적 목마름의 탄식 또한 애절하다. 신자건 비신자건 평화를 갈구하고 하느님체험을 목말라하면서 엉뚱한 곳을 헤맨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 기쁜 소식, Good News 이다. 딱딱한 교리, 읽지 않는 성경책이 아니라 만능 해결사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해방자, 치유자, 착한목자, 선생님, 회장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제부터라도 실존을 부축해주는 복음을 나르자. 그러면 복음이 더욱 매력을 발산할 것이고 복음을 찾는 이들 때문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