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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가톨릭교회의 보고(寶庫)-교황(2)

입력일 2005-04-24 수정일 200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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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직은 하느님 사랑의 성사

인간의 ‘분열 특성’ 때문에 교회에 절대적 리더십 필요

교황과 빌리 그레이엄 목사

2005년 4월 12일자 국민일보의 기자칼럼 「이태영 전문기자의 교회이야기」가 필자의 눈을 끌었다. 「교황과 빌리 그레이엄 목사」라는 제목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전 세계적인 추모열기를 부러워하는 가운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위업을 세계적으로 기렸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는 글이었다. 중요대목을 인용해 보면 이렇다.

『TV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 생각이 났다. 올해 85세인 그레이엄 목사는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 그레이엄 목사의 사역 역시 교황에 못지않다. 대부흥사로서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국내 가톨릭 신자들이 한국의 소록도를 방문했던 교황을 기억하듯 개신교 신자들 역시 여의도 광장에서 카랑카랑하게 복음을 전했던 그레이엄 목사를 기억할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가톨릭의 상징 인물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였다면 그레이엄 목사는 복음주의 기독교권의 상징 인물이었다. …

「과연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전 세계 방송사들, 또한 국내 방송사에서도 교황이 서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중 있게 방송을 내 보낼까」

단언하건대 그레이엄 목사가 서거했을 때에는 교황 서거와 같은 비중으로 보도하지 않을 것이다. …

이 같은 보도 내용과 비중의 차이는 가톨릭과 기독교간 시스템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가톨릭에서 교황은 절대적인 상징 인물이다. …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진정한 상징이 없다. 개신교에는 교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계에서는 세계인의 마음을 잡기 위한 적극적인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교황 서거는 가톨릭 입장에서 전도의 호기였다. 많은 사람이 친숙하게 가톨릭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을 접했다. 그레이엄 목사가 소천하면 개신교는 그의 꺼지지 않은 구령 열정을 널리 알려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국내 개신교계도 마찬가지다. 고쳐야 할 것은 회개하고, 알릴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널리 전해야 한다』(thlee@kmib.co.kr).

이 글을 읽고 나서 필자는 바울로 사도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하며 떠들고 다니는』(1고린1, 12)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1고린 3, 5).

바울로 사도의 권고대로 우리는 교황님을 존경하듯이 빌리 그레이엄을 존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종파의 벽에 대해서는 아직 조심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있지만, 교파의 벽은 인간이 쳐놓은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들」로 여겼다. 곧 이산의 상태에 있는 「피붙이」로 여긴 것이다. 교리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빌리 그레이엄」의 위업을 높이 산다. 이런 의미에서 빌리 그레이엄이 가톨릭 신자로부터도 존경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진심이다.

종들의 종

그건 그렇고 차제에 교황직의 의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주지하듯이 교황직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신 사실(마태 23, 13)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우리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호된 질책과 연결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마태 23, 13).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저들이 613개 조항으로 된 까다로운 율법 조문으로 천국의 문턱을 높이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개탄하셨다. 이렇게 볼 때에 「하늘나라의 열쇠」는 복음의 힘으로 이 천국의 문턱을 낮추고 죄인들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권한과 사명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명이 자칫 군림(君臨)으로 경색될 수 있음을 예견하신 예수님은 미리 누차에 걸쳐서 섬김의 자세를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왕은 지배하지만 신앙의 지도자들은 섬겨야 한다(루가 22, 25~26)고 하셨고, 몸소 모범으로써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요한 13장), 마지막으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 19)하시며 사랑어린 당부를 하셨다.

실제로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서 이 사명에 충실하였으며, 이 교황직은 그의 후계자들을 통해서 면면히 계승되며 오늘에 이르렀다(이에 대한 성서적, 문헌적 전거는 「참 소중한 당신」 5월호에 소상히 게재한 졸고 참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열쇠를 맡기시며 「매고 푸는」사명을 주셨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권한을 주셨을까? 한 마디로 예수님은 당신의 「후계자」가 아닌 「대리자」가 필요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세계교회를 지속적으로 이끌 「하늘이 준 카리스마」가 매 시대마다 필요함을 알고 계셨다. 중심, 푯대, 보루의 역할을 할 절대적 리더십이 언제나 교회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인간이 걸핏하면 분열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기에 「구심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주셨다. 그래서 교황직을 세우셨다. 현실적으로 오늘날 각 교회 교파들이 서로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반목하는 것을 보면 이런 일치의 제도적 장치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황직은 인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 교황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되어 주시며, 예수님의 사랑이 되어 주시며, 우리가 영적 및 윤리적으로 서 있어야 할 삶의 바위(petra)가 되어 주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종들의 종」(servus servorum)이라 부른다.

2000년이 흐르는 동안 교황직을 둘러싸고 교회 안팎으로 박해, 방해, 반대 등이 끊이지 않았다. 때로는 크고 작은 스캔들도 있어 왔다. 그리고 늘 독재, 타락, 경직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성령의 돌보심으로 교황직을 영원히 보전하고 계신다. 교회와 교황은 온 인류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성사(聖事)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대성전 안에 안치된 베드로의 무덤 위 처마에 새겨진 라틴어 대문자 글씨의 비문(碑文) 『Tu es Petrus et su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은 앞으로도 영원히 유효할 예수님의 약속을 떠올리게 해준다.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