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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얼마나 아십니까? (42) 전례공간 (2)

정의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입력일 2004-10-24 수정일 2004-10-24 발행일 2004-10-24 제 2420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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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의 위치는 모두를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라야 한다
제대 (2)

-닫집형태(天蓋)로 덮인 제대(Ciborium)

4세기에 이르러 제대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제대 상단 모두를 덮는 닫집 형태의 구조물이 세워졌다는 증거를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대개 돌, 대리석, 나무 또는 금속으로 제작되었는데 나무로 된 것들은 대개 금속으로 씌워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란 대성전에 봉헌한 닫집처럼 은으로 만들어진 예도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재료는 돌이나 대리석이었다.

14세기 이후로 닫집 형태의 치보리움(Ciborium)은 제대를 벽이나 큰 창문이 있는 동쪽 벽에 위치시키는 변화된 조건에 적응해야만 하였다. 채광을 고려했던 북 유럽에서는 크고 넓은 창문을 동쪽에 설치하는 형태가 발전하였다. 이처럼 특이한 조건들 속에서 무거운 기둥들 위에 놓여져 있는 닫집 형태의 치보리움(Ciborium)은 하나의 장애물로 여겨졌기에, 이 상황에 맞게끔 적용시켜야 했다. 제대 주변의 기둥들은 존속되었지만, 이제 그 기둥들은 닫집이 아닌 커튼을 지탱하는 기둥으로서 보다 가느다란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반면, 성당에 자연광을 최대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 원래 있던 닫집은 창문 위로 올라가 지붕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원래의 정방형 형태를 계속 지녔고 제대 상단과 제대 모두를 덮었다.

이처럼 크고 정교한 상부 구조물에 대한 열광의 결과로서 희생제사의 식탁인 제대 자체는 알아보기 힘들게 되었으며, 본래의 의미를 모두 상실하게 되었고 교회의 중심점이 되지도 못하게 되었다.

- 감실제대(제대 변형의 마지막 단계)

베로나 주교 마테오 질베르티(1524~1543)는 『심장이 가슴 가운데 있고 머리가 정신 가운데 있듯이』 감실을 제대 중심에 놓을 것을 강조하였다. 질베르티(Gilberti)의 이러한 영성에 힘입어 밀라노에서도 감실을 제의실에서 제대로 옮겼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바울로 4세 교황이 이에 적극 찬성하고, 바울로 5세 교황(1614)은 로마 교구의 규정으로 감실을 제대 위에 놓을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그 제대 위에 놓인 감실이 제 나름대로 거창한 구조물이 되면서 제대에 의당 종속해야 할 위치와 비중을 벗어나 제대가 오히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대에 대한 규정

빵과 포도주를 그 위에 놓고 감사기도를 올리고, 빵을 나누는 제대는 동시에 제헌의 자리이자 형제적 애찬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그 위치는 모두를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라야 하며, 둘레는 시원스럽게 돌 수 있어야 한다. 새로 짓는 성당에는 제대 하나만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집회에서 하나의 제대가 한 분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성찬이 하나라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제대의 형태나 자료에는 별로 규정이 없으나 건물 전체와의 관계, 미적 고려, 관습을 참작하되 그 문화권에서는 품위 있고 귀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너무 거추장스럽게 커서는 안된다. 제대는 고정 또는 이동용 일 수 있으며 주교 예식서의 규정대로 축성하는 것이 상례이나 이동 제대일 경우 축복만 해도 된다. 그리고 제대를 너무 편의 위주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면 안된다.

정의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