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33) 가나의 혼인잔치

입력일 2004-08-01 수정일 2004-08-01 발행일 2004-08-01 제 2409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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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베풀어 달라”/ “포도주가 떨어졌다”
살림살이가 힘들고 고단할 수록 한 방의 인생역전을 노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데, 내 인생에도 화끈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복권이나 로또에 목을 맨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기대와 실현 사이의 극단적인 편차가 만들어낸 순수한 가공의 괴물이 기적이란 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기적처럼 실제로는 드물게 일어나면서 모든 사람이 소망하는 것이 세상에 또 있겠느냐 말이다.

요한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일곱 가지나 열거되어 있다. 요한처럼 정직하고 꽉 막힌 사람이 깜짝 기적 레퍼토리로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가다니, 그 때 사람들도 기적을 무던히 좋아했나 보다. 그 가운데 첫 번째(initium signorum)가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다.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이 갈릴래아 근처의 가나라는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옛날 잔치는 호텔식이 아니라서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저물도록 먹고 취하면서 제법 흥이 오르고 있는데, 갑자기 분위기를 깰 수 있는 중대 사안이 발생했다. 술이 떨어진 것이다. 술 없는 잔치는 판돈 없는 노름판처럼 시시한 법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마리아가 예수님께 은근히 눈치를 주셨다고 한다. 예수님의 반응은 이랬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 드리는 말대답치고 꽤 무뚝뚝하게 들린다. 여기서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은 다윗과 엘리사도 같은 말을 쓴 일이 있고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데, 직역을 하면 단순히 『우리 사이에는 무슨 공통점이 있습니까?』라는 뜻이고, 구어체로 옮기면 『됐네요』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결코 무례한 응대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는 또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일까? 요한의 복음서를 뒤적이면 아니나 다를까, 한참 뒤쪽에 기다렸던 표현이 등장한다.

『아버지, 이제 때가 왔습니다』 (요한 17, 1).

이 말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시간을 정리하고 기도를 하시면서 내뱉은 말씀이다. 배신과 체포 그리고 예정된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은 오죽 속이 상하셨을까? 그런데 오래 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했던 말과 아귀를 맞춰내시는 것을 보면 기억력과 논리력 평가점수에 만점을 드려도 좋을 것 같다.

혼인잔치의 기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이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순순히 그 입장을 수용하신다. 다만 하인들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

마침 그곳에 물독이 여섯 개 있었는데, 하인들더러 물을 가득 부어서 채우게 하고 다시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게 하셨는데, 어느새 물이 포도주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었단다.

그런데 기적치고는 좀 시시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상황도 좀 어색하다. 우선 이런 궁금증이 든다. 예수님은 왜 그런 자리에 참가하셨을까?

예수님이 참석하신 것은 혼인식이었다. 설교를 하거나 병든 이를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객들 사이에 자리 잡고 신랑신부 앞날을 축하하고 피로연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늘 무거운 짐 진 자, 박해받는 자, 고통에 신음하는 자들 사이에만 계시는 줄 알았는데, 경우에 따라 술도 몇 사발 흔쾌히 들이키는 유쾌한 면모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포도주는 성서에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으로 자주 나온다. 혼인식도 축복이라는 말뜻과 하느님의 잔치 초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령 이런 대목이 떠오른다.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오 22, 2).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기다리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잠겨졌다』(마태오 25, 10).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되었다』 (묵시록 19, 7).

더군다나 태초에 하느님이 보시기에 혼자 있는 아담이 딱해서 짝을 만들어 혼인을 시켜주신 것을 보아도 혼인의 긍정적인 의미는 충분히 알 수 있다(창세기 2, 18).

말하자면, 예수님은 축하인사를 겸해서 또 축의금 봉투 대신에 술을 한 턱 쏘셨다는 이야기인데, 다운 된 결혼 피로연 분위기 업 시키는 일이 정말 초자연적인 능력의 개입을 요구할만큼 심각하고 긴박한 사안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냉큼 술도가에 달려가서 새 술 받아오라며 두툼한 지갑을 꺼내들고 하인들에게 고액권 지폐를 건네는 예수님의 모습은 더 상상하기 어렵다. 그냥 요한의 기록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날 포도주로 바뀐 것은 두 세 동이 돌 항아리 여섯 개였다고 한다. 여기서 「동이」는 「메크레테스」의 단위를 옮긴 말인데, 39리터에 해당한다. 두세 동이 들이 여섯 항아리면 대강 600리터쯤 된다. 하객들이 이미 엔간히들 취했을 텐데, 피로연 파장할 무렵에 좋은 새 술이 나왔으니, 그날 다들 집에도 못 들어가고 외박을 했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돌 항아리는 원래 유다인들이 정결예식을 행하는데 쓰는 물독이었다고 한다(요한 2, 6). 유다인들은 가령 죽은 사람과 접촉을 하면 제 몸이 불결해졌다고 생각하고 정결의식을 행하였다. 그렇다면 이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선보이신 최초의 기적은 혹시 지금껏 행해지던 유다인들의 정결의식을 물이 아닌 포도주로 대신함으로써 영혼의 참된 정결을 꾀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을까? 여기서 포도주를 구원이란 말로 바꾸어 읽으면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은 「구원을 베풀어 달라」는 요구로 들린다. 그리고 나중에 「때가 되었다」는 말씀도 이해가 간다. 예수님은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상사의 그릇 안에 이처럼 신성한 의미를 담아내기 좋아하신다.

잔치 맡은 이는 예수님의 기적을 눈치 채지 못하고 신랑이 새 술을 꺼낸 것으로 생각한다. 신랑만 치사를 받게 된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비싼 포도주를 베푼 것으로 된 그 신랑은 그러나 주님을 그 자리에 초대했다는 것으로 우리의 본보기가 된다. 주님을 우리의 삶에서 언약을 이루는 혼인식에 증인으로 모시는 것, 참으로 훌륭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우리도 앞으로 신랑신부의 청첩장 발송 리스트에 주님 이름을 빼먹지 말아야 하겠다.

포도주의 주성분이 물이기는 하지만, 물에서 뚝딱 포도주를 만든다는 것은 바위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또는 죽음에서 새 생명을 피워내는 것처럼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권능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야 깨닫는다. 따지고 보면, 성서 기록처럼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기적일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들 사이에 절망이 희망으로, 불신이 경건으로, 미운 마음이 사랑으로 바뀌는 기적다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면.

장 드 베리 공작의 기도서. 28×20㎝. 1404~1408년.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 결혼식 신부가 그림 한복판에 뻣뻣하게 앉아 있다. 오른쪽은 마리아와 예수님, 왼쪽은 신부의 부모로 보인다. 하인 둘이 식사를 시중하고 물독을 대령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예수님은 마법의 지팡이를 자주 사용하셨지만, 여기서는 축복의 손짓 하나로 기적을 행하신다. 마리아는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북유럽 특유의 덧셈식 원근법적 공간처리가 눈길을 끈다.
두쵸 디 부온인세나. 47.6x50.1cm. 1308~1311년. 시에나 두오모 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