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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서울대교구 정의채 신부 (6·끝) 공존·공생·공영을 향해

정리=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12-21 수정일 2003-12-21 발행일 2003-12-21 제 237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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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대, 인류 공통 문화 절실
내가 한 일 내 힘 아님을 깨달아
같이하는 사람의 사목자가 되어서 더 큰보람을 느끼고 싶었다. 사진은 금경축 행사 후 김수환 추기경(왼쪽),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오른쪽)와의 기념촬영.
새로운 시대는 인류 구원을 위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을 요구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문화의 복음화」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특히 아시아의 그리스도교는 불과 2%, 개별적 선교로는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뿌리로부터 복음적인 접근이 요구됐고 여기에서 토착화의 과제가 나온다. 토착화는 즉 문화의 복음화와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는 물질물명이 정신문화를 압도했다. 이제는 문화가 중요해졌다. 문화를 근본적으로 다뤄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리고 그 핵심에 선 것이 바로 생명 문화이다. 생명의 문화를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였다.

「생명의 문화」라는 새로운 차원을 열자 모두가 이에 공감했다. 생명을 사랑하고 윤택하게 하자는 것은 바로 미래를 향한 인류의 새로운 가치관의 초석인 것이다. 어떤 종교나 문화도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생명 수호는 모든 것의 기초이다. 유불선 모두, 이슬람도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존중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존(共存), 공생(共生), 공영(共榮)의 가치관이 나온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문화의 갈등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를 해결할 것인가. 그것은 인간 본성에 근거한 문화로 해결해야 한다. 인간 공통의 문화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 문화는 결국 누구나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를 지향한다. 인간을 근거로, 특별히 인간 생명을 근거로 「다같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문화회의」를 제안하고자 한다.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어떻게 존중하고 협력할지를 논의하고 생명을 함께 살아갈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점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가장 큰 문제는 계층간 분열이 극에 달해 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경험은 가장 좋은 선생』이라는 라틴어 격언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교회는 이 시점에서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대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문제와 관련해서 나는 보다 실천적인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구호만으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주교회의, 한국교회 전체 차원에서 아이들 5000명을 책임지겠다고 하면 낙태수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시대의 고통을 현장에서 함께 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

‘시대의 고통을 함께 하는 사랑의 사목자’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내가 사제로서 가장 절실한 바람으로 품고 있었던 것은 학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와 같이 시대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 같이 하는 사랑의 사목자가 되어서 더 큰 보람을 느끼고 싶었다.

사제로서 내가 보람을 느낀 순간은 많다. 전쟁 때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벗이 되어 희망과 위안을 줌으로써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고, 커다란 선교의 성과를 거둔 것은 가장 큰 보람의 하나이다.

신학교에서 급증하는 사제 지망자들을 교육, 참된 사제로 양성하기 위해 분투했던 것이나 세계주교시노드에서 동양을 대표해 견해를 발표하고 그것이 교황교서에 대부분 반영됨으로써 한국교회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보람이다.

명동성당 주임신부 시절에는 폭력 시위를 저지하고 평화와 생명 존중의 사상을 강조해 젊은이들을 감화시킴으로써 평화적인 시위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명동은 폭력시위의 장소가 아니라 참된 평화, 인내와 희생과 기도로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장소가 돼야 한다는 나의 설득이 젊은이들을 감화시켰던 것이다.

가장 큰 보람 중의 하나는 바로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실무 총책임자로 일했던 것이다. 미천한 사람이 맡은 바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도와준 위원장 박정일 주교, 사무총장 정은규 몬시뇰 등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학문 활동과 관련해서는 토마스 학파와 루뱅학파와의 갈등을 치유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50년대 이후 계속됐던 로마의 토마스 학파와 루뱅학파의 갈등이 내가 세계학술대회에서 동양사상과 토마스의 생명관을 다룬 논문을 발표한 뒤 치유됐다.

명동성당에서 지성인 교리반을 운영하면서 저명한 지식인 1000여명에게 세례를 주어 오늘날 우리 교회 지성인 세계의 바탕을 이룬 것도 보람으로 기억된다. 그밖에 명동성당에 상설 고백소를 설치한 것, 60년대말부터 신학생들을 각자 관심과 능력에 따라 다른 대학에서 학위를 따도록 한 것, 신학교에서 애덕의 날을 실천했던 것 등등 모두가 기억에 남는 일이다.

여전히 남는 아쉬움, 감사와 용서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아쉬움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초지(初志)를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고 되돌아보면 더 잘 살 수 있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아울러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문화분과의 「국제평화회의」를 당초 계획대로 성사시키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당시 나는 유엔대학과 함께, 5년 동안 노벨 평화상을 받은 분들과 미국, 일본, 중국, 소련 등의 대표적인 평화론자들을 초청해 진정한 동양 평화와 인류 평화 특히 한반도의 평화 세미나를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학대학 책임자로 가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유학 시절 지도 교수로 독보적인 토마스 전문가인 파브르 교수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 그는 내가 학위를 받은 뒤에도 자신이 맡던 강의를 제안하는 등 자신이 전폭적인 지원을 할테니 로마에서 공부하라고 권유했고 논문을 학회에 제출하고 토마스 학회 회원으로 추천하겠다고 권했었다. 하지만 고국의 신학생 양성이 최급선무였던 나는 그 제안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이 결코 내 힘이 아니었음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고 이 땅에서 고통 받은 사람들의 순교의 열매이며 민족의 고통에 힘 입은 것이었다. 특히 평신도들의 뜨거운 열정과 적극적인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무 일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선의의 사람들을 모두 만나서 차라도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다. 항상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바치고 싶다. 아울러 신학생 양성, 본당 사목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한다.

아울러 나의 사제서품 50주년을 맞아 마련된 행사에 참석해 축하해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감사한다. 유례없이 530여명의 교구 신부들이 참석한 축하행사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미처 행사장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다시 한번 감사한다.

정리=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