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9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10-26 수정일 2003-10-26 발행일 2003-10-26 제 2370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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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 모습 형성의 계기
전환기 입장 확인 … 쇄신 봉사 점검
민족·사회 문제와 일치운동에 관심
『…이번 공의회가 본질적으로 불변의 교리와 다른 어떤 신기한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대에 맞추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어 가면서 시대가 주는 위험에서 신자들을 보호하고 신앙생활을 완전히 하도록 하는 길을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 뿐이다』(가톨릭시보 1963년 9월 15일자 사설 「공의회를 정확히 인식하라」 중에서).

1962년 10월 11일, 전세계에서 온 2540명의 주교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을 가로질러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입장했다. 이 장엄한 행렬은 전세계에 라디오와 TV로 생생하게 중계됐다. 현대 교회의 모습을 형성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이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개회 연설에서 이 공의회는 예전의 공의회들과 달리 교회의 주요 교리를 다시 확인하거나 오류와 이단을 단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비의 약으로 고치고 자신의 가르침을 제시하면서, 현대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의 말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막을 내리고 발표된 16개의 주요 문헌들 중에 교리 결정이 포함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들은 실제 교회 생활 안에서 실천돼야 하는 사목적 교령들이었다. 그리고 그 가르침과 지침들은 세계 각 지역교회의 실생활을 통해 지난 40여년 동안 구현돼야 하는 시대적인 소명이었다.

교황 요한 23세

교황 요한 23세가 처음으로 공의회 개최 의사를 밝힌 것은 1959년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의 마지막날인 1월 25일이었다. 더욱이 그것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떠올라 이뤄진 것으로 그는 이것을 초자연적인 영감으로 판단했다.

요한 23세의, 시대를 넘어서는 담대한 결정은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라는 표어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것은 현시대에 대한 외적인 「적응」을 넘어서 완전한 의식의 변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식의 전환, 과거의 범주에서 벗어나 현재와 또한 완전히 변한 세계의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와 정치, 권력과 교회간의 밀접한 접촉을 통한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극복, 교회 내에서 종파주의의 반종교개혁적 편협한 정신의 거부, 트리엔트적 신학과 생활 양식으로부터 현대의 정신 상태와 인식에 부합하고 이 세상에서의 교회 실존에 맞는 시대로의 전환 등 모든 것이 바로 「아조르나멘토」라는 개념에 포함돼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는 전세계 지역교회의 사목과 교회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판의 소리도

실로 거대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이 일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이었다. 특히 공의회 개최가 교회 안팎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비판의 소리가 있었다.

신학의 다원주의로 인한 신앙의 혼란, 교회의 민주화로 인한 교황과 주교의 권위 약화, 종교자유와 종교간 대화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가 가져올 수 있는 종교 무분별주의 등은 보수주의자들의 우려였다. 공의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공의회 초에 결정이 났다. 10월 13일 1차 총회에서 공의회는 그동안 활동한 위원들을 승인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교부들은 교황청에서 제출한 10개 위원회의 위원 구성에서 엄격한 로마적 신학 세력의 우세와, 그것이 구시대적인 정신이 공의회 전반을 이끌어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1차 총회는 20분만에 끝났고 이탈리아 주교들의 수가 대폭 줄고 세계 각국의 주교들이 대거 참여한 위원회 명단이 10월 16일 확정됐다.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감동적인 폐회식으로 막을 내리기까지 모두 4차례의 회기로 진행됐다.

제1회기에는 전례, 계시, 매스컴, 동방교회에 관한 안건들이 토의됐지만 어떤 의안도 통과되지 못해 뚜렷한 성과 없이 마쳤다. 제2회기를 준비하는 도중, 요한 23세가 1963년 6월 3일 세상을 떠났다. 후임 교항 바오로 6세는 즉시 공의회를 계속할 것임을 알렸고 1963년 9월 29일부터 12월 4일까지 제2회기가 계속됐다.

제3, 제4회기를 거쳐 1965년 12월 7일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을 포함한 4개의 문헌이 발표됨으로써 공의회는 4개 헌장, 9개 교령, 3개 선언 등 총 16개의 공식 문헌을 반포했다. 바로 이날 교황 바오로 6세는 1054년 로마와 비잔틴이 서로 파문하고, 그래서 대이교(大離敎)를 초래했던 파문선고의 폐기를 진지하게 선언했다.

공의회의 결과는 전세계 지역교회의 사목과 교회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공의회의 가르침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역시 공의회를 통해 전환기에 처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하고 쇄신과 봉사의 자세를 다시 점검했다. 전례가 현대화됐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과 사회 문제에 능동적인 관심을 갖게 됐으며 개신교와의 일치운동, 타종교와의 대화에도 열린 자세로 임하게 됐다.

지난해 세계교회는 공의회 개막 40주년을 지냈고 2005년이면 폐막 40주년을 맞게 된다. 공의회의 정신이 과연 얼마나 세계 교회 안에, 특별히 한국 교회 안에 스며들고 뿌리를 내렸는지에 대해 우리는 이제 좀더 엄정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제3차 바티칸공의회를 논하지만 2차 공의회의 결실이 완전히 꽃피우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의회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