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대구대교구 김영환 몬시뇰 (17·끝) 은퇴 후 생활

입력일 2003-10-19 수정일 2003-10-19 발행일 2003-10-19 제 2369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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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너그럽고 성실하게 살면서
교회에 순명하는 삶 다짐
북경에서 6년여를 지내는 동안, 북한에 일이 생겨 다녀온 일이 있다. 나진 선봉 지구에 가톨릭 병원을 건립하는 일 때문이었다. 독일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의 이름으로 성당을 짓기로 했는데 사실은 북한에서는 남쪽에서 돈 대는 것을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기에 독일 사람 명의를 빌린 것이다. 돈은 대구대교구와 다른 몇몇 분이 대기로 하고, 실무는 김상진 신부(베네딕도회?당시 북경 주재 신부)와 카렌 마끄리나 여사와 내가 맡았다. 그 일 때문에 북한에 여러번 갈 기회가 있었다.

공사가 80% 이상 진전 되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유는 상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북한 내부 사정으로 인한 것 같다. 끝까지 도와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게 생각된다. 언젠가 이 체제가 무너진 다음에나 가능할런지….

65세에 학교를 퇴임한 후 북경에 가서 6년이나 있었으니, 만 70세가 되었다. 70세면 교구 방침에 따라 모든 공직에서 떠나야 하기 때문에 귀국하여 교구에서 차려준 고희 잔치를 마지막으로 은퇴 생활을 시작했다. 교구청에서 이문희 대주교님과 최영수 보좌주교님을 모시고 여러 동료, 처장, 국장 신부님들과 같이 생활하며 마음 편히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제 이 칼럼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1999년 4월 11일 북경 동교민항 성당에서 고희 기념미사 후 열린 축하식에서.
어렸을 때 신심이 돈독한 부모님들로부터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평생을 두고 부모님들께 배운대로 살아왔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갈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성인신부가 되어라. 남의 사정을 헤아려줄 줄 아는 너그러운 신부가 되어라. 어떤 일을 하든지 성실히 하고 교회와 주교에게 순명하며 사는 신부가 되어라』 이것이 8남매 중 외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면서 하신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나머지 생애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려고 한다.

가끔 후회스러운 일이 없지도 않지만 그것은, 그때 그 일이 잘못되었다는 후회인데, 지금 생각하기에 내가 더 노력했더라면 더 잘 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후회이다. 그러나 어쩌랴! 하루에 아침이 두 번 오지 않듯이 우리의 인생도 한 번 지나면 그만인 것을…. 그래도 지금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진 선봉 지구에 지으려 했던 가톨릭 병원 부지에서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내 인생의 짧음을 기억하소서.

당신께서 만드신 인생의 덧없음을 기억하소서.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잎이옵니다.

하오나 자비와 용서의 주 하느님,

내 구원의 하느님

죄를 채찍으로 다스리고 잘못을 매로써 다스리고

사랑만은 거두지 않으리라는 당신을 믿고

팔십 평생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였나이다.

당신의 종을 불쌍히 여기시어 영원히

당신 사랑을 노래하게 하소서』

- 성무일도 중에서.

이 칼럼을 읽어주신 모든 신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사제생활 사십여 년 동안, 그리고 고희를 지난 오늘까지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나머지 저의 인생도 온전히 그분께 바치면서 매일미사 때마다 한분한분 기억하며 기도드리겠습니다.

가톨릭신문사와 이 칼럼을 위하여 애쓰신 기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