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90) 교황 비오 11세와 라테란 조약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09-28 수정일 2003-09-28 발행일 2003-09-28 제 2366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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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티칸 통치권 완전 회복
영토와 주권 지닌 독립국가로 인정
이탈리아와의 오랜 갈등 대립 해소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중의 하나인 바티칸 시국. 그러나 총 면적 13만3천여평, 그 3분의 1이 정원으로 되어 있는 이 작은 도시 국가는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심장부이다. 뿐만 아니라 바티칸 시국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와 공식 외교 관계를 맺고 국제 무대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엄연한 독립 주권 국가이다.

바티칸 시국은 교황청과 분명하게 별개의 명칭이지만 국제법적으로는 동등하게 인정받고 있으며 이 국가의 통치자인 동시에 교회의 수장인 교황 안에서 분리시킬 수 없게 일치돼 있다. 한마디로 바티칸 시국은 교황의 세속 주권이 인정되는 장소이자 세속적인 권한과 영적인 권한이 일치돼 행사되는 유일한 장소이다.

바티칸 시국이 성립된 것은 1929년 이탈리아를 파시즘 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2월 11일 라테란 궁전에서 교황청을 대표하는 가스파리 추기경(P. Gaspari)과 이탈리아 정부의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 수상은 협정과 재정 협약, 그리고 정교 협약 등 세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바티칸시라는 새로운 국가에 대한 교황의 완전한 통치권이 회복됐다.

라테란 조약이 필요했던 것은 이탈리아와 교황청과의 오랜 갈등과 대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른바 「로마 문제」는 교회와 국가간의 대립과 혼란을 가중시키고 상호 불신과 증오와 불화를 심화시켜왔던 것이다.

로마 문제는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이 로마를 점령하고 이를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함으로써 시작됐다. 이탈리아의 통일운동 세력들은 1861년 로마를 새로운 국가의 수도로 선포했다. 1870년 독일과 프랑스간의 보불전쟁이 발발해 프랑스군이 로마에서 철수하자 즉시 로마로 진군해 9월 20일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했고 로마는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됐다.

이로 인해 천년 동안 이어지던 교황령이 종말을 고하고 교황은 바티칸으로 물러났다. 교황들은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당한 것으로 규정하고 항의했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물러서지 않았으며 이후 60여년 동안 이러한 「로마 문제」는 교회와 국가간의 끊임없는 불화를 일으켜왔다.

1929년 라테란 궁전(사진 위)에서 체결된 조약으로 바티칸시국에 대한 교황의 완전한 통치권이 회복됐다. 사진 아래는 조약 비준 후 교황청에서 기념 촬영한 가스파리 추기경(앞줄 왼쪽)과 무솔리니.

무솔리니도 해결 의지

1922년 2월 6일 밀라노 대교구장인 레티(Ambrogio Damiano Achille Ratti, 1857~1939) 추기경이 비오 11세 교황으로 선출된다.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1800년대 전형적인 애국주의자였던 비오 11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베드로 대성전 중앙 발코니에서의 첫 축복식 때 「로마 문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비오 11세는 또 같은 해 회칙 「우르비 아르카니」(Urbi arcani)에서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의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함축적인 뜻으로 교황령 점령에 반대한 역대 교황의 정책을 계승하면서 「로마 문제」를 해결하려는 뜻을 밝혔다.

한편 무솔리니 역시 파시즘의 승리로 권좌에 오른 이후 「로마 문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나타내면서 이탈리아 정부 역시 「교회에 관한 입법 계획」을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교황과의 화해와 교회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1926년 비공개 협의가 시작됐고 같은 해 10월 4일부터는 공식적으로 협상이 진행됐다. 교황청의 위임을 받은 변호사 파첼리(Francesco Pacelli) 교수와 정부의 위임을 받은 바로네(Domenico Barone)는 11월 24일 조약 초안을 완성하고 이듬해 2월부터 초안의 재검토가 진행됐다.

파시스트들의 방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끝에 1928년 11월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났고 이때 양측으로부터 전권을 이양 받은 가스파리 추기경과 무솔리니 수상은 마지막 실무 협상을 이끌었다.

1929년 2월 7일 가스파리 추기경은 교황청 주재 외교관들에게 조약 체결이 임박함을 알렸고 11일 라테란 궁전에서 마침내 라테란 조약이 서명됐다.

조약은 전문과 27개 항목 및 4개 부칙으로 구성된 협정과 재정 협약, 그리고 45개 조항의 정교 협약 등 세 가지로 구성돼 있었다.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국이 일정한 영토와 국민 및 주권을 지닌 독립 국가임을 인정하고 따라서 주권 국가로서 바티칸 시국은 화폐와 우표를 발행하고 국민을 다스리며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받아들이는 등 국제 사회에서도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조약은 또 가톨릭을 이탈리아의 국교로 인정하고 이탈리아의 상수도 시설이나 철도를 연결하며 방송국과 우체국의 신설 등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교황청의 소유를 인정하고 국제법상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건물들을 규정하며 교회의 주요 법인 조직체들은 이탈리아 정부의 어떤 간섭도 받지 않도록 합의했다.

한편 교황청은 로마를 수도로 한 이탈리아 왕국을 정식으로 인정했고 양측은 라테란 조약에 반대되는 이전의 모든 법들을 폐기하는데 합의했다. 이로써 교황청과 이탈리아가 60여년 동안 대립됐던 문제는 완전하게 해결됐다. 교황은 『이탈리아는 하느님에게 돌아왔고 하느님도 이탈리아에 되돌아왔다』고 말할 정도로 조약에 대한 만족을 표시했다.

라테란 조약은 파시즘 정권이 물러나고 1944년 공화국이 된 뒤에도 새 헌법에 의해 채택됐다. 다만 1985년 양측 합의로 가톨릭을 국교로 존속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갱신됐다.

박영호 기자